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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Nov 01. 2023

인천을 지운 인천야구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2023 Off-Season SSG 랜더스

지난해 SSG 랜더스의 정규시즌·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김원형 감독이 전격 경질됐다. 김원형 감독은 지난해 KBO리그 40년 역사상 최초로 와이어 투 와이어(정규시즌 첫 날부터 끝까지 1위를 내주지 않은 것)를 달성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시즌 후 SSG 구단과 3년 총액 22억 원(계약금 7억·연봉 5억)의 거액에 재계약하기도 했다. 임기 중 '자진 사퇴'가 아닌 '일방적 계약 해지'의 형식으로 사령탑에서 물러난 감독에게는 잔여 연봉을 전액 보장해 주는 것이 프로야구 판의 불문율이다. SSG 구단은 앞으로 2년간 구단 운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10억 원 지출의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김원형 감독을 쫓아낸 것이다.


감독 경질 소식과 더불어 팬들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이진영 타격코치, 박정권 1군 타격보조코치, 채병용 불펜코치 등 다수의 코칭 스태프가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구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팀을 쇄신하고 더욱 사랑받는 강한 팀으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변화가 불가피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큰 설득력을 갖지는 못하는 이야기였다. 우선 이진영 코치가 타자들을 지도한 지난 4년간 SSG의 팀 타격 지표는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했다. 타격보조코치와 불펜코치는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보직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 마디로 '성적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경질한 게 아니겠냐'라는 것이 팬들의 생각이다.


가장 큰 공감대를 얻고 있는 추측은 '정용진 구단주가 SSG의 전신인 SK 와이번스의색을 지우려 한다'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오후에 옷을 벗게 된 코치진 중 상당수가 현역 시절 SK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이다. 김원형 감독은 20년이 넘는 현역 시절 동안 단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은 '순혈 스타'임과 동시에 통산 134승을 기록한 에이스 투수였다. 채병용 코치는 2000년대 후반 김광현이 등장하기 전까지 SK의 토종 1선발 역할을 맡았다. 박정권 코치는 현역 시절 '해결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진영 코치는 20년간 8,000타석 가까이 소화하면서도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KBO리그 최고의 교타자였다. 


이들이 다 함께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활약하는 동안 SK는 2년 연속 정규시즌·포스트시즌 통합우승의 영예를 누렸다. 이진영 코치가 FA를 통해 LG 트윈스로 이적했던 2009년에는 8월 25일부터 정규시즌 최종전까지 단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으며 KBO리그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6할 승률을 달성했고, 이듬해에는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에서 승리하며 'SK 왕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로부터 8년 후에는 박정권이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각각 끝내기 홈런과 결승 홈런을 쏘아 올리며 팬들에게 네 번째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다.


그러니 이들은 SSG 팬들에게 있어 단순히 '감독'과 '코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는 곧 SSG를 상징했다. 팬들이 SSG를 좋아하기 전까지 사랑했던 SK가 어떤 팀이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SK는 곧 21세기의 인천 야구를 의미했다. 애석하게도 창단식조차 인천이 아닌 서울에서 개최했던 '그'는 이들을 모두 쫓아냄으로써 노골적으로 기존의 인천 야구 색을 벗겨내려 하고 있지만.




'해태 색' 지우고 외면받았던 KIA, 인천 부정하고 '비인기 구단' 등극한 현대

'영구결번' 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을 '고졸 신인' 김진우에게 물려줬던 KIA. (사진 출처 : 이글루스)

2023년의 SSG 이전에도 과거의 팀 컬러를 지우고자 노력했던 팀이 있었다. 선동열의 '영구결번'까지 취소해 가며 해태의 그림자를 지우려 하던 2000년대의 KIA 타이거즈와 '연고지 이전'이라는 충격적인 결단을 내린 현대 유니콘스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팬들의 싸늘한 냉대를 돌려받았다는 것이다.


2001년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했던 KIA는 올가을의 SSG보다 한 뼘 더 과격하게 과거의 색을 지우려 했다.  단순히 해태 시절의 인사들을 팀에서 내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선동열의 영구결번 등번호인 18번을 신인 선수에게 물려주려 할 정도였다. 물론 140km/h 초·중반만 던져도 파이어볼러 대접을 받던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150km/h 파이어볼러' 김진우에 대한 기대가 엄청났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동열은 단순한 에이스가 아니라 20세기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던 투수였고,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가진 광주 야구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선수의 등번호를 고졸 신인에게 물려주려 하니 엄청난 반발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선동열 영구결번 취소 사건' 외에도 KIA의 해태 색 지우기 관련 에피소드는 차고 넘쳤다. KIA로 이름이 바뀐 직후부터 단장직을 맡았던 정재공 前 단장은 "'V1'을 한 번 더 하면 자연히 'V10'이 되는 게 아닌가"라는 말과 함께 '10번째 우승' 대신 '첫 번째 우승'을 목표로 천명했다. KBO리그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였던 이강철이 영구결번을 못 받는 등 아홉 번의 우승을 일궈냈던 레전드 선수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무리한 해태 색 지우기는 팬심이 돌아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해태의 이름을 달고 리그에 참가했던 2001년에 4,246명의 경기당 관중 수를 기록했던 타이거즈는 이듬해부터 2007년까지 단 한 번도 4,000명대 이상의 평균 관중을 기록하지 못했다.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의 성과를 올리는 등(2004~2006) 마냥 암흑기만 보냈던 것이 아님에도 달성한 성과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2009년 구단 역사상 10번째 우승을 거둔 뒤에도 이어졌고, 결국 KIA가 2010년대 들어 선동열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해태 시절의 유니폼을 부활시키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20세기의 해태와 광주 야구를 외면한 채로는 진정한 '타이거즈'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청소년 관객 무료입장 이벤트를 실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텅텅 비어있는 현대 유니콘스의 홈구장. 사진이 촬영된 2006년은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으로 관중이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새천년이 밝자마자 수원으로 도망쳤던 현대 유니콘스는 '야반도주' 이후 5년간 3번의 우승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매년 평균 관중 수 최하위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리그 최악의 비인기 팀이었다. 오죽하면 "수원 택시 기사들은 수원 종합운동장을 가자고 하면 알아들어도 수원 야구장을 가자고 하면 모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인천 야구라는 정체성을 버린 현대가 그 누구의 정체성도 대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연고지 이전 직후부터 모기업의 경영난이 심화된 현대는 KIA와 달리 실수를 만회하지 못한 채 해체 수순을 밟았다. 마지막으로 KBO리그에 참여했던 2007년, 현대는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2,000명대 평균 관중을 기록했다(리그 전체 평균 관중 8,144명). 이로써 현대는 '최고의 성적과 최악의 인기를 가진 팀'이라는 오명을 가진 채 초라하게 그라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21세기 인천 야구 지우기 시도하는 '21세기 야구단' 랜더스의 미래는?

자신의 '부캐'로 알려져 있는 '제이릴라'의 가면을 쓴 관중과 함께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사진 출처 : 뉴시스)

다시 2023년 11월의 SSG로 돌아와 보자. SSG가 여러모로 SK의 색을 지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이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김원형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의 공백을 대체할 이들 또한 과거 SK와 인천 야구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다. <스포티비뉴스>에서는 차기 인사에 대해 "'올드보이'보다는 참신한 인사에게 새로운 판을 맡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라고 보도했다


어쨌건 SSG 프런트는(혹은 프런트 위의 '어떤 사람'은) '와이번스'를 버리려 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 비룡들은 최소 2000년부터 2020년까지의 '인천 야구'를 상징했다. 21년은 KIA가 '해태'로서 존재했던 시간보다 1년 더 길다. 새로운 호남 야구를 정의하지 못했던 KIA는 10년간 무등 아재들의 핍박을 받은 끝에 백기를 들고 해태와의 공존을 택했다. 지금까지의 '인천 야구'를 대변하는 것에 대해 포기한 SSG의 미래는 어떨까?


물론 마냥 암울한 미래만을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지금 SSG의 대대적인 리브랜딩은 신세계그룹의 '유통 혁명가' 정용진 부회장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또래 CEO와는 달리 거침없는 SNS 소통 행보로 '재계 소통경영의 1인자'라는 별명 또한 가지고 있는 정용진 부회장은 이미 노브랜드, 킹소주24, 일렉트로맨, 제이릴라, 원둥이NFT 등 수많은 브랜드의 런칭과 성공을 이끈 바 있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통의 인천 야구와 SK 와이번스의 정체성 없이 강한 개성을 내뿜는 SSG 랜더스의 미래가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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