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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Sep 25. 2023

집중할 때야, 육성선수의 성공은 밑바닥에서 시작이니까

[지난주 히어로즈] 09.19 ~ 09.22 키움 히어로즈 박수종  

타석에 서기까지의 과정이 힘들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두 번의 신인 드래프트 미지명, 육성 선수 제안을 기다렸지만 조용했던 휴대전화. 매 순간 KBO리그 최고의 선수였던 같은 포지션의 경쟁자. 동기들의 방출을 지켜보며 2군에서만 머무른 첫 1년, 대주자·대수비 역할로 철저히 한정된 그다음 1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눈앞의 공에 집중했다. 드래프트까지 1년을 앞두고 부상과 부진의 악재가 겹쳤어도. 빅리그 문턱까지 밟아본 에이스 투수를 상대로 배터박스에 들어선 선발 데뷔전에서도. 퇴근하자마자 야구장까지 찾아온 부모님이 의식돼도. 그렇게 지난 일주일 동안 팀에서 3번째로 많은 안타를 쳐냈다.




경성대학교 시절의 박수종. (사진 출처 :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

"조금 마음이 아팠습니다." 2022년 겨울, 육성선수 신분으로서 버건디 유니폼을 입었던 박수종이 몇 개월 전 신인 드래프트에서의 미지명을 돌아보며 남긴 감상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청년 실업자로 전락할 상황이었음에도 그가 '조금 속상했다' 이상으로 낙담하는 일은 없었다. 아, 이어서 한 마디 덧붙이기는 했다. "조금 더 성숙해진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알게 됐고요. 그렇기에 더욱 간절하게 임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구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이기 때문에 입에 발린 소리를 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당신이 그의 아마추어 시절을 톺아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충암고 시절 평범한 성적을 기록한 박수종은 201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한 뒤 경성대학교에서 다시 방망이를 잡았다. 고교 시절 주목을 받다 대학에 진학한 선수 중에서는 '대1병'에 걸리는 경우도 많지만 박수종은 예외였다. 새내기 시절부터 3할 6푼 4리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단숨에 경성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에는 4할 타율과 함께 6할대 장타율을 기록하며 컨택과 파워를 겸비한 타자로 성장했다. 대회 일정이 무기한 연기됨은 물론 단체 훈련도 제한되며 수많은 아마야구 선수가 힘들어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뤄낸 스텝 업이었다.


그 해 따라 박수종의 컨디션이 유난히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그는 시즌 내내 허리 부상에 시달리면서 단 한 경기도 유격수로 나서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아예 유격수로 뛰는 것을 포기하고 드래프트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외야수로 전업해야 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그럼에도 팬데믹에 대해서는 "즐기면서 재밌게 야구를 했더니 좋은 결과가 따랐다"라고, 부상에 대해서는 "경기를 못 뛸 줄 알았는데 하려고 하니까 되더라"라고 말하며 도리어 능청을 떨었다. 심지어는 단 한 번의 부진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토너먼트 대회에서 4타수 무안타로 부진해도 "내 페이스가 안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며 이튿날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박수종은 남들이 시련이라고 생각할 만한 일을 어렵게 여기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은 역경을 헤쳐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앞에 두고 괜찮을 것이라는 자기 암시와 함께 지금 당장에 더더욱 집중하는 것일 테다. 결국 타인을 돌아보게끔 만든 것은 마냥 속상해하는 대신 포기하지 않았던 근성의 야구인 박수종이었으니까.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두 번째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10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한 박수종은 육성선수 신분으로서 겨우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라운드 이내에 지명된 선수들과 자신의 차이에 대해 "각오가 정말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하며 독기를 드러냈다. 2022년의 목표를 자신이 키움 히어로즈에 어떻게 필요한 선수인지 알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그는 "수비가 좋은 선수다. 타구 판단이 좋고 송구 능력도 뛰어나다"라는 코칭 스태프의 호평을 받으며 정식 선수가 되는 데 성공했다. 2023시즌을 앞두고는 자신처럼 육성선수로 커리어를 시작해 MVP의 자리까지 올랐던 서건창의 등번호를 물려받기도 했다.


생애 첫 선발 출장이 있었던 그날은 두 눈으로 직접 라인업을 확인하기 전까지 1회부터 경기에 나선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이 대수비 요원이던 자신에게 "형 오늘 스타팅이에요" 같은 말을 하며 장난을 쳤기 때문이었다. 숨도 제대로 안 쉬어질 정도로 긴장한 나머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경기 시작 전 타격 훈련 때는 방망이가 부러지는 기이한 일까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상대 팀 선발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공을 던진 적이 있는 태너 털리. '신인 선수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안타를 치지 못한 날'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홍원기 감독이 "이것저것 눈여겨볼 것이 많아서 선발로 기용했다"라고 말한 만큼, 수비와 주루에서 가치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첫 타석의 초구부터 몸쪽으로 파고드는 예리한 변화구가 날아왔다. 프로에서 단 하나의 안타도 없는 타자에게도 방심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공이었다. 그런데 박수종에게는 그 공이 너무 잘 보였다. 이어지는 승부에서 같은 구질의 공이 날아오자 망설임 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떨어지며 데뷔 첫 안타를 만들어 냈다. 1루에서 주루 코치와 주먹을 맞부딪히고 있으니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경기 전 선발로 출전한다는 전화를 드렸는데, 아무래도 퇴근하자마자 야구장으로 달려오셨을 것 같았다. 하지만 관중석에 계신 부모님의 모습을 찾는 대신 투수의 공에 더더욱 집중했다. 그렇게 첫 안타를 기록한 지 30분 만에 두 번째 안타를, 그다음 타석에서 세 번째 안타를 신고했다.


이튿날에도 8번 타자 우익수로 선발 출장한 박수종은 4타수 2안타로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마지막 타석에서는 한화 이글스의 필승계투를 맡고 있는 박상원의 146km/h 강속구를 외야로 날려 보내며 데뷔 첫 타점을 신고하기도 했다. 이틀 동안 8타수 5안타 1타점. 첫 선발 출전 2경기서 8타수 2안타 4타점 1도루로 프로야구계를 뒤집어 놓았던 서건창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활약이었다.




(사진 출처 : 엑스(구 트위터) @MOND_HELD)

"장기적으로 키움의 외야 중심에서 우승에 일조한 선수 중 한 명이 되고 싶습니다." 육성선수 계약 직후 구단과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던 박수종이 '이 팀에 어떻게 필요한 선수인지를 알리는 2022년이 됐으면 좋겠다'는 각오와 함께 남겼던 말이다. 단기적인 목표는 달성했다.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속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야 한다.


2014년 키움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진출 당시, 그 중심에는 리그 최고의 타자로 거듭난 트레이드 이적생과 육성선수가 있었다(박병호·서건창). 박병호의 역할은 그와 마찬가지로 트레이드 데드라인 직전에 키움으로 팀을 옮긴 이주형이 맡을 수 있어 보인다. '육성선수 신화'의 배역은 누가 대신하면 좋을까. 서건창과 같은 등번호를 달고 데뷔 첫 선발 출전 경기서 대활약을 펼친 이에게 알맞지 않을까.


물론 MVP는커녕 주전 자리를 따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박수종의 메인 포지션인 중견수 자리에는 '3할 20홈런 페이스'의 이주형이 버티고 있다. 코너 외야에서 주전이 되기 위해서는 키움이 지난 몇 년간 수집한 무수한 거포 유망주와 경쟁해야만 한다. 그러니 박수종은 다음 경기에서도 매 타석마다 집중할 것이다. '육성선수'부터 시작해 '1군 주전 경쟁자'의 자리까지 올라온 그의 가장 큰 무기는 그러한 류의 단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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