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 히어로즈 김혜성
키움 히어로즈의 내야수 김혜성이 한 경기에서만 두 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며 팀의 승리를 견인했다. 첫 번째 홈런은 1대 0으로 뒤쳐진 1회말에 터진 동점 솔로 홈런, 두 번째는 연장 11회말에 경기를 마무리짓는 끝내기 홈런이었다. 김혜성은 이날(4월 7일) 경기까지 11경기 동안 4개의 홈런을 쳐냈다. 지난해 풀타임 시즌을 소화하면서 7홈런을 기록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최근 3년간 리그 정상급 내야수로서 활약 중인 김혜성은 2024시즌을 마친 뒤 포스팅(비공개 경쟁입찰) 시스템을 통해 미국 무대에 도전할 예정이다. 키움은 지난 10년간 총 4명의 선수를 메이저리거로 키워냈으며, 이들 중 2명(강정호·김하성)은 김혜성처럼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포스팅 직전 시즌에 수비 부담이 큰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40홈런, 30홈런을 쳐냄으로써 펀치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혜성은 지난 7년간 1군 826경기서 3252타석에 서는 동안 26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약 125타석 당 한 번꼴로 홈런을 쏘아올린 수준이었다. 이는 강정호(25.61타석당 1홈런), 김하성(27.55타석당 1홈런)과 대비되는 김혜성의 차이점이자 약점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올해는 13타석당 한 번꼴로 홈런을 만들고 있다. 비록 시즌 극초반이기는 하지만, 타자로서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장타'를 극복한 모양새다.
'이제 겨우 시즌 초반일 뿐이다'라는 반론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혜성의 '초반 반짝'은 그가 커리어 내내 '슬로우 스타터'였기에 더욱 뜻깊다. 김혜성은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2018년의 4월에 2할 5푼 4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처음으로 개막전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2019년에는 4월이 끝날 때까지 1할대 타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20년과 2022년에는 첫 11경기 동안 2할 초반의 타율이었으며, 본격적으로 리그 정상급 내야수로 성장한 2021년에도 4월에는 2할 1푼 9리의 타율에 그쳤다.
타자로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던 지난해에는 개막 직후 한 달간 3할 2푼의 타율을 기록하며 '슬로우 스타터'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장타가 많지 않았던 탓에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는 .776에 그쳤다(동기간 리그 28위). 올해의 김혜성은 시즌 초반부터 기복 없는 고감도 타격을 보여주면서도 전례 없는 펀치력까지 뽐내는 중이다. 현재 김혜성의 OPS는 1.098로, 리그 5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김혜성의 대활약을 '초반 반짝'으로 치부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눈에 띄게 달라진 그의 타격 지표에 있다. 'A급' 수준이었던 컨택 능력이 리그 정상급 교타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약점이었던 변화구 능력이 향상됐다. 이로써 헛스윙이 현저하게 감소하며 스윙 하나하나가 위력적인 타자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까지 김혜성의 통산 컨택률은 80.7%였다. 이는 지난 10년간 KBO리그에서 3000타석 이상을 소화한 타자 54명 중 34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물론 컨택률이 타자의 컨택 능력을 100% 대표하는 데 쓰이는 지표는 아니지만, 같은 시기에 리그 정상급 교타자로 평가받았던 이용규(92.9%), 이정후(91.7%)와 비교하면 분명 아쉬운 수준이었다. 김혜성의 목표는 '빅리그 주전'이지 'KBO리그 주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 경기까지 김혜성의 컨택률은 90%다. 커리어 평균 대비 약 10% 상승했으며, 지난 시즌과 비교해도 7.4% 높아진 수준이다. 한편 지난 7년 동안 10%에 육박했던 헛스윙 비율 데뷔 이후 처음으로 5%대까지 떨어졌다(5.1%). 작년까지 김혜성과 같은 팀에서 뛰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외야수 이정후의 KBO리그 통산 컨택률은 91.7%, 헛스윙률은 3.3%다. 과장 좀 보태서 '이정후와 비슷한 수준'으로 이정후와 비슷한 수준까지 컨택률을 끌어올린 셈이다.
물론 '단순히 날아오는 공을 모두 공에 맞추기 때문에' 상위권의 컨택률과 헛스윙률을 기록하는 타자들도 있다. 이런 타자들은 실제 타구의 질과 타격 성적에서 괴리가 나타난다. 반면 김혜성의 경우 소프트힛의 비율을 16.3%에서 14.3%로 줄이는 등 작년보다 강한 타구를 더 많이 생산하면서도 컨택률과 헛스윙률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김혜성의 컨택 능력이 눈에 띄게 좋아진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떨어지는 공에 약하다'라는 약점을 극복한 덕이 클 것이다. 김혜성의 커브 상대 통산 타율은 2할 2푼 7리이다. 아깝게 타격왕 타이틀을 놓쳤던 지난해에도 유독 커브를 상대로는 1할대 타율에 그치는 등 어려워했다. 그런데 올해는 통산 70%대에 머무르던 커브 상대 컨택률이 100%다. 더 이상 커브에 속절 없이 방망이가 헛돌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제 경기에서는 브레이킹 볼에 일가견이 있는 김민우의 커브를 걷어 올려 홈런포를 가동하기도 했다.
김혜성은 1군에서 주전 내야수로 자리 잡은 이래 꾸준히 장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풀타임 2년차였던 2019년에는 당시 KBO리그를 지배하던 플라이볼 혁명의 기류에 편승하기 위해 자신의 타격폼을 어퍼 스윙으로 전면 수정했다. 팀 선배였던 김하성의 모습에서 자극을 받아 3대 450을 치는 수준이 될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진했다. 지난해에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장타를 개선하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장타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처음으로 어퍼스윙을 시도한 2019년에는 단 하나의 홈런도 쳐내지 못함은 물론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낮은 장타율을 기록했다. KBO리그 팬이라면 모두가 알 정도의 근육남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두 자릿수 홈런 시즌조차 만들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장타에 있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으나, 여전히 '장거리형 타자'와는 거리가 먼 수준이었다. 팬들은 김혜성의 뜬공 타구가 워닝 트랙에서 잡힐 때마다 '밥 한 공기만 더 먹지'라는 탄식을 자아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서는 "평소처럼 똑같이 준비"했다. 1년 먼저 꿈의 무대로 떠난 이정후에게 "그냥 하던 대로 하라"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진하고, 언제나와 같이 조금이라도 몸에 나쁜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파워에 대한 욕심은 지울 수 없었기에 하체의 움직임만 '조금' 보완했다. 이 약간의 '수정'이 스프링캠프 당시 이승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스카우트로부터 '스윙이 이전에 비해 약간의 변화가 있는데 그 변화된 스윙폼을 가리켜 ‘메이저리그 스타일’'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리고 홈런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깊숙한 외야 플라이로 끝났을 타구가 힘을 잃지 않고 쭉쭉 뻗더니,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고 있다. 고척 스카이돔을 가득 채운 관중들은 이제 김혜성의 타구가 하늘 높이 뜰 때마다 한숨 대신 환호를 연발한다. 이승원 스카우트는 김혜성의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에 대해 "2루수는 타격에서 쳐줘야 한다. 엄청 많이 쳐야 한다. 파워도 있어야 한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이제 김혜성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바라던 대로 '엄청 많이 쳐주는 2루수'로 거듭나는 중이다.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사실 김혜성의 '하던 대로'는 다른 선수들과 야구인으로부터 감탄을 사는 수준의 노력이다. 컨택과 장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 타격 메커니즘은 이제 다른 팀 선수가 참고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웨이트 트레이닝으로써 계속 갈고 닦은 운동능력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에게도 "KBO리그 최고 수준"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다. 언제 장타를 뻥뻥 날리게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언제'가 2024년이 됐을 뿐이다.
'오랫동안 꿈을 그린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소설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명언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말로의 소설 '왕도로 가는 길'에서 사용된 말라바르의 속담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긴 정체불명의 문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출처 불명의 명언은 수많은 한국인이 가슴 속에서 꿈을 그리게끔 만들어주었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이상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게끔 했다.
김혜성의 타구가 힘을 잃지 않고 야구장 위 하늘의 '혜성'이 된 이유는 팬으로서 명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그가 단 한 번도 '홈런 타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동경했던 선배와 동기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꿈을 그리면 결국에는 그 꿈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숙이는 동안, 홀로 고개를 들어 타구를 지켜봤던 김혜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