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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Apr 02. 2024

'한 타석'을 위한 5년·116경기·228타석

키움 히어로즈 박준형

석 점 차로 뒤쳐진 9회말 2사, 주자 1루. 마운드에는 각각 6.8억, 4억 원의 연봉을 받는 베테랑 타자 두 명을 연달아 잡아낸 전년도 우승팀의 불펜 에이스. 8번 타순으로서 배터박스에 들어선 타자는 투수가 초구로 던진 147km/h의 빠른 공을 잡아당겼다. 결과는 경기를 마무리 짓는 3루수 앞 땅볼 아웃. 


타자는 이 한 번의 타석을 위해 5년의 시간을 본무대 뒤에서 보냈다. 2부 리그에서도 1순위 유망주에게 밀려 매년 백업 신세였다. 4시즌 동안 퓨처스리그 한 시즌 규정타석보다 적은 228타석의 기회만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1군 경기장의 플레이트 뒤에 앉고 강팀의 마무리 투수와 승부를 펼쳤다.




광주일고 시절의 박준형. (사진 출처 : <부산파이낸셜뉴스>(좌), <전상일 기자의 리딩베이스볼>(우))

'홈런 하나를 쏘아 올리긴 했지만 타율이 2할 4푼 2리(95타수 23안타)에 머물렀다. 장타력도 좋다고 하긴 어려운 수준이다. 빠르게 1군에 올라오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2019년 신인 드래프트 직후 <케이비리포트>에 올라왔던 스카우팅 리포트의 일부다. 해당 칼럼에서 지적하듯, 타격 성적만 놓고 봤을 때는 박준형을 지명한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가 본격적으로 포수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지 단 1년 만에 모교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다는 점을 모른다면 말이다.


박준형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당시의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는 투·타 양면에서 여러 명의 슈퍼스타를 보유하고 있었다. 마운드에는 투수로 전업한 지 몇 달 만에 고교야구를 평정한 '2학년 에이스' 정해영과 면도날 제구력의 좌완 에이스 조준혁, 그리고 훗날 160km/h를 던지는 파이어볼러가 조정호(現 조요한)가 있었다. 타선에서는 '5툴 플레이어' 유장혁(現 유로결)과 김창평 듀오가 상대 팀 투수진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광주일고의 주말리그-전국대회 20연승과 황금사자기 우승의 주역으로 주목받았다. 박준형이라는 이름 석 자를 주목하는 신문은 없었다. 


하지만 광주일고의 돌풍을 유심히 지켜본 이들은 조연이 있기에 주연의 존재감 또한 빛남을 알았다. 아마야구에 정통한 전상일 <파이낸셜 뉴스> 기자는 당시 광주일고의 전국대회 선전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면서 '(포수 박준형이) 큰 무리 없는 리드로 1학년 김지민을 리드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박준형의 안정된 리드 또한 (우승에) 큰 몫을 했다' 등의 코멘트를 남겼다. 박준형이 졸업한 이후의 광주일고에 대해 '(2학년 포수가) 박준형만큼 침착한 수비와 인사이드워크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 큰 경기에서 마스크를 쓰는 모습을 봐야 알 수 있다'라면서 우려하기도 했다.


앞서 인용한 <케이비리포트>의 스카우팅 리포트에서는 박준형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올해 본격적으로 포수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어깨가 좋은 수비형 포수다.' 박준형은 2학년 때까지 주말리그와 전국대회를 통틀어 6타석에 들어서는 데 그쳤다. 자신의 포수 수비에 대한 좋은 평가를 단 1년 만에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프로야구 선수가 된 박준형은 2군에서 두 번째 포수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박준형이었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2019년 신인 드래프트 2차 6라운드 전체 54순위서 키움 히어로즈의 지명을 받아 프로야구 선수가 된 박준형은 지난해까지 단 한 번도 1군에 콜업되지 못했다. 시범경기와 스프링캠프 기간 역시 1군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일 없이 2군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퓨처스리그에서도 첫 번째 포수가 아니었다. 상위 라운드서 드래프트 지명을 받은 동갑내기 포수 배현호(2018년 2차 4라운드)와 거포 유망주 주성원(2019년 2차 3라운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움 구단의 플랜 A는 박동원과 이지영이라는 확고한 두 주전 포수가 1군을 지키는 동안 주효상(2016년 1차지명)과 배현호, 그리고 주성원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플랜B'였을 박준형은 데뷔 시즌 2군에서 상위 라운더 유망주 포수 3인방이 410타석의 기회를 받는 동안 15경기에 나서는 데 그쳤다.


2019년 20타수 4안타의 기록만을 남겼던 박준형은 이듬해 42경기에 나오며 91타석을 부여받았다. 주효상이 1군에서 적극적으로 기용된 덕분이었다. 이 시즌의 박준형은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이상 높기는 했으나, 1할대 타율이었으므로 유의미한 성적을 올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3년 차인 2021년에는 부진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전년도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경기에 나갔다. 50경기서 109타석에 나서며 2군 포수 중 가장 많은 타격 기회를 얻기에 이르렀다.


이는 박준형이 팀 내 또래 포수 중 '포수'로서 가장 큰 가치를 갖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루키 시즌에 매우 적은 기회를 받으면서도 수비 면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였던 박준형은 2년 차였던 2019시즌에 3할 8푼 6리의 높은 도루 저지율로 자신의 강한 어깨를 증명했다. '1할대 타율'이라는 문제 정도는 적고 불규칙한 출전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편 경쟁자였던 배현호가 공수 양면에서 더딘 성장세를 보이고 주성원이 입스에 시달림에 따라, '2군 2순위 포수'로 커리어를 시작한 박준형은 자연스레 팀 내 입지를 넓히게 됐다.




2024년 3월 29일, '1군 포수'로서 고척 스카이돔의 그라운드 위에 버티고 앉은 박준형.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2군 1순위 포수가 됐다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2021년에 2할 4푼 7리의 타율과 4할대 출루율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후 상무(국군 체육부대) 야구단에 지원했으나, 최종 탈락 후 현역으로 입대했다.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구단에서는 무려 일곱 명의 고졸 포수를 새로 영입했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박준형의 전역을 앞두고 차세대 국가대표 포수로 성장했다.


최전방 부대의 포병으로서 야구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자신에게 남은 시간 또한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다. 전역하자마자 즉시 경기에 투입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일과를 수행하는 틈틈이 짬을 내 몸을 만들'었다. 주말에는 아마야구 선수 출신인 후임의 도움을 받아 함께 운동을 했다. 기술적인 면에서 막히면 유튜브에서 타격 관련 영상을 찾아봐 가며 해결했다. 포수로서의 역량에 대해 고민하다가 리더십, 심리 관련 서적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만기 전역 후 8월 말부터 9월까지 한 달 동안 아홉 경기에 나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인이었던 그가 모든 경기서 포수 마스크를 쓰고 프로야구 선수의 공을 받았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육성선수 신분에서 정식선수로 전환하여 재계약에 성공했다. 고형욱 단장은 FA 자격을 얻은 베테랑 포수 이지영을 사인 앤 트레이드로써 SSG 랜더스에 보낸 뒤 "박준형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서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을 (1군에서) 써봐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 그래야 미래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3월 27일 창원 NC전을 앞두고 콜업된 박준형은 이날 경기 후반에 대수비로 투입되며 처음으로 1군 경기서 포수 마스크를 썼다. 8회말 원아웃 주자 3루의 위기에서 1루수 최주환과 3-2 병살을 합작하며 흠 잡을 데 없는 데뷔전을 치렀다. 2일 뒤에는 고척 스카이돔에서 LG 트윈스의 셋업맨 유영찬을 상대로 데뷔 첫 타석에 들어섰다. 비록 내야 땅볼로써 경기의 마지막 타자가 되었지만, A급 투수의 공도 방망이에 맞출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어른들 모두 처음에는 어린이였다(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프로야구단에서 부동의 주전 포수로 활약 중인 이들 또한 처음에는 공수 양면에서 미숙함을 지적받던 신인이었다. 


'백업 포수' 박준형의 지난 두 경기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재계약을 위해 노력하던 현역 군인 시절의 박준형을, 자신보다 스타트라인에서 출발한 경쟁자 사이에서 살아남았던 시절의 박준형을, 고교 졸업 후의 불투명한 미래를 32인치 미트로써 조금이라도 선명히 만들고자 했을 시절의 박준형을 소개해 본다.


이제 지난 5년간의 '시절'의 박준형을 기억하게 됐다면, 사고를 뒤집어서 그가 이 모든 과정을 거쳐 1군 무대에 도달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가 아직 발전의 여지가 충분한 20대 중반의 나이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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