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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Dec 01. 2024

영원한 천국은 없다. 완전한 행복이 없듯이.

<영원한 천국>, 정유정, 2024

[영원한 천국 - 정유정] 영원한 천국은 없다. 완전한 행복이 없듯이.


가끔 나는 속에 가득 차 일렁이는 무엇인가 때문에 사무친다. 이 안에 가득 넘실대는 것이 무엇이든. 쏟아 넘쳐버릴 것 같은 가득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다. 하는 수 없이 쏟아낸다. 목 끝까지 오르는 것들을 손끝이 받아낸다. 정신없이 써 내려가면 무뎌진 흑심만큼, 마음도 닳아진다. 욕망도 자유를 욕망한다. 완전히 해소되지 못할 바에야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자유로 잠시나마 해갈(풀 해 解, 목마를 갈 渴) 할 것을 욕망한다. 오래 머물러 닳고 닳은 마음들은 더 이상 정념(뜻 정 情, 생각할 념 念)이 되어버린 상태 그대로로는 존재 의의를 갖기 힘들다. 오래된 마음들은 말이 되고 글이 된 뒤에는 공포(공평할 공 公, 펼 포 布)로 인해 확신을 얻고 새로운 국면을 맞고는 한다. 나는 그 순간들 가운데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가득 차 일렁이는 것들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정은 늘 묵직한 위로가 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존재적 한계를 내재하고 있고, 우리는 결코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으며, 다만 존재의 실체가 없는 와중에도 사유(생각할 사 思, 생각할 유 惟)만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무정형(無定形)으로 존재 의의를 계승한다고 믿는다. 내가 기록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넘실대는 것들을 손끝으로 쏟아내지 않고는 못 견뎌하는 것도 아마, 나의 사유들이 세상에 남는다면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나의 방식으로 정돈된 형태이길 바라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가끔 생에 천착했던 얼굴들을 떠올리다, 단단함이 서려 있던 외할아버지의 야윈 얼굴을 생각한다. 남은 삶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던 의사의 예언은 생을 향한 할아버지의 집념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사유에 실체를 부여하려는 나의 노력은, 목숨을 지키려던 할아버지의 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욕망한다. 그것이 완전한 행복이든, 영원한 천국이든. 온전한 형태로 영원히, 삶의 가까이에서 행복하기를 염원한다.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은 인간의 생에 대한 욕망의 극단적 형태를 가정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예의 인간의 물리적 한계이지만, 인간은 또한 자신이 지닌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자 하는 것. 누구보다 높이 날고자 하는 것. 누구보다 멀리 나아가고자 하는 것 같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들이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문화(글월 문 文, 될 화 化) 영역에서 가장 오랜 세월, 주축 역할을 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본작은 죽음이라는 내재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조명하고 있다. 인간 수명의 연장은 의료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또 그에 도로 영향받으며, 자기 자신의 수명 또한 연장해 왔다. 그리하여 불로불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그리스로마신화를 통해 신적 존재에 욕망을 투영하던 시절부터, <사바하>가 불로불사에 대한 집착이 미륵마저 타락시키는 이야기를 묘사하는 현대까지 뚜렷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불멸을 꿈꾸었던 동서고금의 권력자들과 현대인 사이에는 인간 수명에 대한 정보에 있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불균형이 존재한다. 진시황이 불멸을 꿈꾸던 기원전 200년대에 남성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2200여 년의 세월 동안 인간의 수명은 약 두 배 정도가 늘어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명이 두 배 가량 늘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는 것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관성의 법칙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심리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유효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었고 연장된 생 안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질은 괄목할 성장을 이루었으나, 연장된 삶과 향상된 삶의 질이라는 강력한 결합으로도 불멸에 대한 욕망을 불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결을 달리하더라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대부분의 시도들은 궁극적으로 불멸과 연관이 깊다. 조지오웰의 <1984>, 앤드류 니콜의 <가타카>,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마이너리티리포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마블의 역작 자비스와 비전처럼,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꾸준히 미래기술과 그 이면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부작용(버금갈 부 副, 지을 작 作, 쓸 용 用)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욕망에 따라 진보에 투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수의 기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기저에는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기술발전의 명(明)이 암(暗)을 극복하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이 물리적, 지능적 장애 혹은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조금 더 완전한 행복을 구가하겠다는 의지이며, 영원한 천국으로 스스로를 이행(옮길 이 移, 다닐 행 行)하겠다는 본능적 욕구에서 기인한다. 본작은 인간 본질에 대한 관찰의 결과를 토대로, 의학의 발전에 기대어 불멸을 향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신체는 포기하더라도 마음, 영혼, 지적능력과 같은 비물리적 영역만이라도 불멸화하고자 하는, 현실에 있을법한 움직임을 전제(앞 전 前, 끌 제 提)한다.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되지만 강력한 기술력 덕분에 사후에도 신체가 있는 실제의 삶처럼 감각할 수 있는, 그러나 이미 신체는 소거되었기 때문에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래서 궁극의 행복이 존재하는 영원한 삶.


AR(Artificial Reality), VR(Virtual Reality) 기술의 성장이 더 이상 놀랄만한 일이 아닌 현대인에게 작품이 가정하는 세계관, 인간의 기억을 그대로 가상공간인 롤라에 업로드하여 현실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설정은 설득력 있는 착점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핍진성(닥칠 핍 逼, 참 진 眞, 성품 성性)이 본작의 설득력과 몰입도 높은 전개를 추동하고, 정유정 특유의 속도감과 현실감 높은 대화(인물끼리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작품과 독자 사이의 대화이기도 하다) 내용과 템포, 뚜렷한 이미지가 그려지는 세밀한 필치의 묘사가 더해져, 작품은 마침내 거대한 드림시어터가 된다. 본작은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두 쌍의 연인들이 영원한 천국을 표방하는 기술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체감상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한다.


롤라와 영원한 천국 사이에 등식 관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영원(길 영 永, 멀 원 遠)과 천국(天國)이 개념적으로 정의되어야 하고, 이 추상적 관념들이 구체화되었을 때 본작이 조성하고 있는 환경과 일치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 사랑, 우정, 부와 명예 등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는 영원성이 인간에게 중요하고도 긍정적인 관념임을 표상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영원은 존재의 의의를 무력화시키고, 현재 상황을 의미 없이 연장 및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이 인간에게서 실존(實存)할 권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현재 상황이 부정적이라면 영원은 곧 지옥과 동의(한 가지 동 同, 뜻 의 意) 일 것이다.


천국은 전 세계에서 부상한 수많은 철학과 종교에서 전제하는 궁극적 이상(다스릴 이 理, 생각할 상)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현실이 두 연인들에게는 천국이었던 것에 비해, 랑이 누나는 우리의 현실을 축소해 놓은 듯한 공간을 두고 ‘복마전(항복할, 엎드릴 복 伏, 마귀 마 魔, 대궐, 전각 전 殿)’이라고 일축한다. 요컨대 영원과 천국은 인간마다 달리 정의할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관념이다. 영원과 천국의 관계성 역시 살펴볼만한데, 생이 영원으로 연장된다고 해서 생이 머무는 현실이 천국이 될 수 없고, 생이 머무는 현실이 천국이라고 해서 영원이 축복일 수만은 없다는 데에서, 영원과 천국은 상호보완이 가능한 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이로써 영원한 천국은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존재하기 어려운 공간이며,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만한 공간은 아니다.


게다가 현재의 모든 인간은 그의 모든 과거의 합집합임에 틀림없으나, 거대한 기억의 아카이브와 영혼을 가진 인간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지에 의문이 남는다. 특정인의 기억을 학습한 AI가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인간이 새로이 처한 상황에서 했을법한 선택을 행하며 대신 삶을 살아낸다고 해서, 이 일련의 단계적 동작들, 즉 알고리즘을 진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억의 합집합이 과연 뛰는 가슴 때문에 온몸에서 맥박을 느끼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찢어질듯한 아픔 때문에 밤 새울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진정(眞情)으로 말이다. 인상 깊은 것은 영원한 천국이라는 모순적 경계에 들어서고 나서야, 인물들의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아니 인물들이 그제야 자신의 현실에서의 진짜 삶이 ‘얼마나 진짜’였는지 무의식 중에 깨닫는다는 것이다. 경주의 드림시어터는 경주와 해상이 대화를 토대로 콘셉트를 정하고, 해상이 경주를 위하여 설계했다. 그러나 경주는 해상이 디자인한 이야기의 울타리를 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경주가 만들어가고 있는 그의 새로운 운명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경주가 삶은 끝이 있기에 아름답다는 카프카의 지론을 기억하고 있고, 랑이 언니가 “삶이 소중한 건 끝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시어터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경주는 카프카식 실존주의의 뼈대가 되는 이 명제의 일정 부분, 어쩌면 이 자체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정 하나, 랑이 누나가 베토벤 사후 3년 동안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현실에 실재하는 랑이 누나가 경주에게 “삶이 소중한 건 끝나기 때문이야”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드림시어터에서의 경주는 자신의 죽음을 가정(거짓 가 假, 정할 정 定)하며 랑이 누나라는 강력한 철학적 동지의 죽음을 떠올리고, 랑이 누나가 했던 말 중에서 그녀가 죽기 전에 했던 말 혹은 했을법한 말로 카프카의 언어를 떠올린 것이다. 이것이 랑이 누나와 경주의 실제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다고 하더라도, 굳이 이 문장을 채택했다는 점은 경주가 두 번의 생을 통해 깨닫고 체화한 바가 무엇이며, 현재의 경주는 어떤 사람인지, 본작이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축약한다.


이를 경주가 롤라에 업로드되기 전부터 이미 운명을 직접 만드는 편을 선택했고, 드림시어터 안에서 참혹한 심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노트에 적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자. 그가 롤라에 업로드한 당시에 품었던 진의나 욕망과는 관계없이, 현재의 그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직시한 욕망을 기반으로 자신의 의미를 정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실존임을 깨달았다. 롤라에 업로드된 것은 그의 기억과 의식이 뒤섞인 정보 덩어리일 뿐이지만, 삶에 대한 그의 의지도 섞여 있다. 게다가 그의 몸은 더 이상 물리적 한계에 시달리지 않는다. 경주는 이생에서 살아보지 못한 진정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드림시어터에서 전개되는 자신의 삶에 한계 상황을 내재하는, 롤라에는 존재할 수 없는 설정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물론 롤라에서의 이야기에도 경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세 번의 죽음과, 그 후에 그에게 찾아온 개흙 같은 어두움으로의 침잠의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미 경주는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올 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삶에서야 비로소, 죽음 뒤에도 남아 있는 이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함을 배운다. 경주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지은이 드림 시어터에서 서윤희라는 이름으로 현현한다는 설정은, 그가 여전히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에 천착하고 있으나, 남은 자들의 삶이 나아가는 것으로 죽음의 의미가 세상에 남는다는 것을 조금씩이나마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음을 은유한다. 비극은 경주가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이유가 그가 롤라에서의 삶을 ‘진짜 삶’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라는 데에서 파생한다.


경주는 롤라에 업로드되어 알고리즘이 되고 나서야, 사랑이 떠나도 남은 마음은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한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었던 경주가 해내지 못했던 연산(펼 연 演, 셈 산 算)을 롤라에서의 경주가 해낸다는 사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애틋하고도 처연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롤라에서처럼 계산되거나 예측되기 어려운 사고(事故)의 연속이다. 역설적이게도 경주는 롤라를 통해 실존을 이룩하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고만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롤라는 인간의 실존을 이룩하는 데에 유리한 배경이 되지만 영원한 천국도 현실도 아닌 거대한 도서관에 불과하다. 본작은 이런 아이러니를 통해 복마전 같은 현실과 상실이 연속되는 시절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의견을 제시한다. 우리는 죽는다. 그 분명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정 둘, 랑이 누나는 사실 카프카를 언급한 바 없고, 다만 경주가 기억하는 혹은 스스로 갖게 된 신념을 각본 화했다. 이 경우 경주가 첫 번째 가정보다 더욱 강력하게 “삶이 소중한 건 끝나기 때문”이라는 관념과, 존재는 본질에 앞서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실존주의적 사상을, 직시하고 있거나 동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경주, 혹은 경주의 기억을 학습한 AI, 혹은 경주의 기억을 토대로 경주 대신 선택을 행하고 있는 알고리즘은, 롤라에서의 삶을 그에게 찾아온 삶의 2막, 두 번째 기회라고 인지한다. 롤라에서의 경주는 지은을 놔주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에 드리워져 있었던 한계를 정면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 자신에게 다가온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충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선택한다.


동생과 지은, 베토벤, 랑이 누나의 죽음을 겪으면서 이미 인간은 무력하며,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완벽한 정적임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와 행위가 얼마나 미력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 알기 위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초로의 나이를 불사하는 경주의 모습이야말로 랑이 누나가 이야기 한 “삶이 소중한 것은 삶이 끝나기 때문”임을 깊이 이해하는 인간의 단면이자, 실존을 이룩한 인간의 뒷모습이다. 경주는, 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희망이 산산조각 나도, 모든 작전이 실패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운명에 자신을 내던지는 찰나에야말로 진정 위대해진다.


<완전한 행복>과 <영원한 천국>은 제목만으로도 정유정이 그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설명한다. 인간은 완전함과 영원함을 욕망하지만, 첫째, 진정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우리 생에 존재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을 때 그 가능성은 0에 수렴할 만큼 미미하다. 둘째,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것일 수 없고, 그것이 행복이든 천국이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그 속성을 소유한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은 미완결성과 비영속성, 요컨대 인간 존재의 내재적 한계를 구성 요건으로 한다. 경주가 영원한 천국을 표상하는 롤라에 업로드되고, 그 거대한 반어(反語) 속에 놓이고 나서야 영원한 천국과 완전한 행복은 타인이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의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미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야말로 본작의 본질이다.


삶은 거대한 모순과 같고, 한 편의 짙은 농담과 같다. 존재할 수 없는 것, 존재하더라도 존재만으로 인간의 실존을 무력화하는 것. 죽음을 전제하지 않는 삶이라고 해서 영생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인지가 부족한 경우 그 삶은 행복보다 불행에 가까워진다. 필연적으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결과가 그토록 자기 파괴적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짓궂은 농담인가. 여명이 블라인드 틈을 타서 온 방에 스며드는 주말 새벽. 완전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더라도. 행복 사이에 불행이 끼어들고, 천국과 지옥이 번갈아가며 내 세상에 찾아오더라도. 그저 나는 나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저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서로를 껴안았던 해상과 제이처럼.


나의 별에 뿌리내린. 떠나다, 지우다, 차마 잊지 못한 이름. 치앙마이에서 장미를 만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본작을 읽으며 장미를 떠올렸다. 사막 여우를 보러 가고 싶었다. 흔한 이름이 나에게만은 다른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만물이 메타포인 세상에서 당연한 일이면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사건이기도 하다. 나만의 장미, 나만의 붉음, 나만의 색깔로 남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고유한 이야기들이 우주에 가득하고, 그래서 우리 세계에는 수많은 포물선이 만나 만든 이야기의 교차가 점점이 아로새겨져 있다. 작은 별에 홀로 핀 장미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내야 했던 영겁 같은 기다림의 찰나들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설레하던 여우의 작은 심장을 생각한다.


개흙 같은 어둠 속에 침잠했던 경주에게 찾아온 햇살 같은 지은을 생각한다. 죽어가는 해상을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제이를 생각한다. 윤희를 만나 다시 뛰기 시작한 경주의 가느다란 맥박을 생각한다. 내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기록은 내가 될 수 없다. J를 보며 커졌던 동공이나, 뒤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가슴팍에 우묵하게 쌓였던 그리움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드센 너울 꼭대기에 까치발로 서서, 계곡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리라, 위대한 시시포스처럼. 그 다짐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영원한 천국은 없다. 완전한 행복이 없듯이. 그러나 서로를 매만지고, 그 색깔을 기록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 순간만은 영원하리라. 누군가의 그림 속에 장미처럼. 그러나 깨어지고, 무너져도, 죽음 앞에서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하여, 나는 나로 살겠다고 분연했던 사유만은 영원하리라. 랑이 누나의 입을 통해 불멸을 증명했던 카프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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