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일탈 I
"술은 이제 캔맥주 하나도 다 못 마실 때가 많으니까요, 약으로 기분은 유지가 되는 것 같긴 한데 정신적으로 뭔가 자꾸...... 그러다가 요즘에 그럼 담배를 피워 볼까 생각이 들어요."
2주 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서 말했던 내용이다.
사실은 그보다 한 달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는데 말하지 않았다. 금방 지나갈 마음 같아서.
그런데 계속 생각이 들기에 의사에게 말했던 것이다. 안 된다고 확실히 말해주겠지 예상하면서, 아주 멋쩍은 웃음을 마스크 안에 감추고.
그러나 의사는 내 얘기를 기록한 후 새로 발생한 스트레스 여부를 체크하더니, 화이트보드에 기분과 감정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하고, 당분간 약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가자는 얘기만을 할 뿐이었다.
처음, 바람맞으며 담배라도 한 모금 후- 하면 정말 후련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자마자, 당연히 절친한 친구들에게 말했었다. 반응이 정 반대였다.
ㅈ: 그러다 진짜 피는 거 아냐? 정신 차려.
ㅅ: 그래? 난 담배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난 무조건 술이면 돼.
의사의 반응도 똑같이 전해주고 2주를 보내면서도 둘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의 반응은 둘 주변인들의 차이에도 있었다. ㅈ의 생활권에는 흡연자가 없고 ㅅ의 주변인들은 회사 언니들까지 흡연자가 절반이다.
부쩍 가을을 서늘하게 담고 있는 요즘의 나는 드디어 그제 저녁 ㅅ에게 물었다.
"담배 종류가 너무너무 많아. 이름도 어려워. 언니들은 뭐 피워?"
친구가 두어 개 알려주었다.
여자들이 많이 피우는 담배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세상에 커피 향, 복숭아 향, 망고향 담배가 있단다. 와우! 마음속으로 담배 한 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어제, 내 생일.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퇴고를 마치고 전송 후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5000원.
담배 이름을 실수했다. 그렇지만 그게 뭐라고 가방에 넣고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드디어 샀다는 사실에 너무 신나는 거였다.
바로 단지 안의 흡연 구역으로 갔다.
정오가 막 지나는 시각.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흡연 구역 벤치 한 자리에 앉아 나는 담배를 피웠다!
후-.
너무 신났다.
이 별 것 아닌 것을 뭘 그렇게 고민하고 눈치 봤을까.
그냥 한 번 해보면 됐을 것을.
피식, 한심한 웃음이 났다.
남들이 보면 웃겠지만, 내게는 사건 같은 것이라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 오후에 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올해 생일 기념으로 흡연! 너무 씐나 씐나!
바람맞으면서 아파트 흡연 벤치에서 피움."
ㅅ: 올~! 잘했어. 숨어서 피지 마! 맛은 있냐? 그래, 그게 뭐라고 고민을 해, 우리 나이에. 그냥 다 해보는 거지.
근데, ㅈ한테는 말하지 말지. ㅋㅋ
ㅈ: 미친것.
욕먹어도 좋고 잘했다고 무조건 응원해줘도 좋고, 아무래도 좋았다.
해 보고 싶은 걸 생일 핑계로라도 해보니 좋았다.
이 발암물질을 대낮에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피워놓고 이렇게 즐거워할 일은 아닐 테지만, 나는 즐겁다.
그런데.
역시, 반항도 일탈도 다 어릴 때 해버리는 게 나은 건가? 지금의 내 나이는 거칠 것이 없어서 더 위험할까?
문득 글을 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번 생일 자축 세리머니는 그렇게 충분히 우습게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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