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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월 Mar 17. 2023

후회는 씁쓸하지만...

인정


착착착착....


계절이 바뀌어 밤에 창을 열기 시작하자 그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가는 줄을 가볍고 빠르게 뛰어넘는 소리.


그 소리는 이곳에 이사 온 후로 밤 열 시쯤이면 늘 울리는 줄넘기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이어지는 줄 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몇 번을 다짐하고 무너지고 반복했더라.

나도 내일부터는 딱 300번씩만 넘어야지.


사계절이 두 번 지났다.

문을 조금 오래 열어두었던 며칠 전 밤, 착착착 줄 넘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얼른 이 일을 알고 있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계속 같은 사람인 걸까, 우리는 궁금했다. 성별도 모르는 달밤의 줄넘기 주인공을 추켜세우며 게으른 서로를 타박했다.

우리도 정말로 운동해야 하는데, 말뿐인 걱정도 했다.

그러다 보면 운동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슬쩍 내빼기 마련이었다.


조금 전 혼자 밤산책을 나가려다 베란다에서 바람 쐬는 걸로 대신하자며 문을 활짝 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착착착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리를 숙여 방범창살 사이로 그리고 그 너머 나무들 사이로 요리조리 시선을 틀어가며 소리를 쫓았다.

아! 드디어 보였다.

캄캄한 공간에 선명한 분홍 티셔츠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저 이였구나! 잘 뛰네.

몇 개나 넘으려나. 1000개?



그때였다.

애앵.

근처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시 허리를 숙이고 여자의 주변을 살피니 벤치 근처에 유모차가 보였다.

아기를 데리고 나왔구나.


그걸 본 나는 앞뒤를 꿰맞추기 시작했다.

평소엔 남편 퇴근 후 아이를 재우고 나오느라 늦은 시간에 줄넘기를 했나 보구나. 오늘은 남편이 늦는 모양이지. 자는 아기라도 혼자 두긴 불안하니까 날도 풀렸겠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유모차에 태우고 나왔나 보군.

헌데, 칭얼거리는 아기를 멀리서 몇 마디 어르기만 할 뿐 여자는 유모차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러다 자지러지는 아기 울음소리 듣는 거 아닌가 싶을 때, 줄넘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는 분홍 티셔츠 가까이로 아기를 안은 남자가 다가섰다.


엄마에게 손을 뻗는 아기에게 잠깐 뺨을 내어 준 여자가 다시 줄넘기를 시작했다.

남자는 아기를 안고 달래며 근처를 서성였다.


아, 남편이 아기를 보고 있었구나.

세 식구의 봄밤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불금이었다.


순간 어떤 시절이 확 사무쳤다.

혹시 무작정 후회부터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보았는지.


좀 더 가볍게 살 걸.

구차하다 생각 말고 잘못된 것은 하나하나 짚어줄걸.

무조건 믿고 맡기는 것처럼 굴며 용기 없이 떠넘기지 말 걸.

내가 원하는 시간은 그렇게 보낸 시간 끝에 있지 않음을 외면하지 말 걸.


착착착.

"됐다. 가자!"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들의 두런거림이 멀어졌다.

뭘까.

저 단출한 가족의 무엇에서 나는 이토록 흔들렸나.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이런 현상을 나는 '갱년기'라고 부른다.

그럴지도 아닐지도.


후회하는 것은 꼭 실패한 것만 같아서 한번 결정한 것은 다 그럴만했다고, 애써 뒤돌지 않으며 살았다.

책 속 어느 문장에서, 영화 주인공의 눈빛에서,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부부의 뒷모습에서 이제는 예상치 못한 후회가 날아든다.


갱년기일수도 계절이 바뀌면서 드는 우울감일 수도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게 모두 '진짜'라는 것이다. 불쑥 튀어나와 당황스럽지만 꾸민 것도 틀린 것도 없다.

자존심으로 덮어 두었던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그때 조금 더 안을 걸. 조금 더 욕심낼걸. 조금만 더 부지런할걸.

시간이 멈춰있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서. 


아무 인과도 없는 감정에 휘말려 십수 개월만에 내 얘기를 적다 보니 또 뜬금없는 생각이 끼어든다.

그래도 불금인데 그 젊은 부부는 결국 집에 돌아가 치맥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여자는 전날 밤 야식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후회하며 내일 다시 줄넘기를 들고 나와 착착착...


여자의 줄넘기를 응원한다.

가끔 쉬어가더라도 잊을만하면 창너머에서 익숙한 그 소리가 들리면 여전히 아는 사이처럼 반갑겠다.

한겨울이 와 다시 창문이 닫히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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