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전시된 누드 작품 대부분은 여성 누드다. 남성 누드는 왜 여성 누드에 비해 절대적으로 소수일까? 남성 예술가와 남성 후원자가 미술계를 주도한 전통 속에서 남성의 시선(male gaze)이 투영된 여성 누드가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관능적인 여성 누드가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고, 18세기에 이르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부그로와 카바넬의 <비너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1928년에 제작된 롯테 레이저스타인(Lotte Laserstein, 1898–1993)의 <내 아틀리에에서>는 오랫동안 남성 화가의 시선으로 본 여성 누드의 전통을 전복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작품 속 공간은 화가의 아틀리에다. 화면 왼쪽에는 롯테 레이저스타인 자신이 앉아 붓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남성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 누드’를 그리는 남성 화가의 시선이 권력의 중심이었다면, 레이저스타인은 그 권력을 뒤집는다. 여기서 여성은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주체다. 이제는 여성이 ‘보는 자’, 남성이 ‘보여지는 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를 품위 있고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 기존의 성적 대상화 대신 관찰과 존중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이 자화상은 단순히 화가의 외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행위다. 1920년대 바이마르 시대 여성들은 예술 아카데미 진입이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여전히 미술계의 주류는 남성이었다. 레이저스타인은 그런 사회적 한계 속에서도 '여성도 예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을 작품 속에 투영했다. 그녀가 붓을 쥔 손과 집중하는 눈빛은 단순한 작업 장면이 아니라, ‘여성의 노동’과 ‘창조 행위’의 상징이다. 이는 남성의 시선 아래 놓였던 여성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급진적 제스처로 해석될 수 있다. 레이저스타인은 이 작품에서 '나는 예술가로서 내 공간과 내 시선을 가진다'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나의 화실에서>는 베를린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의 미학을 충실히 따른다. 신즉물주의는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등장한 예술 사조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표현주의의 감정적·주관적 경향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이들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재현하며, 전쟁의 상처·사회적 부패·도시인의 소외 등 당대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회화는 사진처럼 정밀하고 감정이 절제되어 있으며, 종종 풍자와 사회비판의 의식을 담고 있다.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츠, 크리스티안 샤드, 롯테 레이저스타인 등이 대표 작가로, 그들의 작품은 냉정한 관찰 속에 인간 존재의 불안과 시대의 냉혹한 진실을 담아냈다.
레이저스타인은 이 작품에서 과장된 감정 표현을 피하고, 냉정하고 정제된 색조로 현실을 묘사한다. 회화적 감정이 절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차분한 색면, 견고한 구성, 그리고 고요한 빛과 같은 회화적 절제 속에서, 레이저스타인은 예술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이 갖는 가장 중요한 미학적 성취는 시선의 정치적 재배치다. 전통적으로 남성 화가는 시선의 주체였고, 여성 모델은 관찰과 감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레이저스타인은 그 관계를 완전히 재편한다. 레이저스타인은 ‘그림을 그리는 여성’을 화면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미술사의 시선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이 작품은 여성의 몸이 아닌, 여성의 지성·노동·의지를 시각화한 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