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 유물로 전락해버린 전설
20년 지났음에도 여전한 오리엔탈리즘
얕은 깊이로 다시 묻는 인간 존재는 진부해
거대한 철학적 담론 사라진 사랑놀음
SF 영화의 전설 ‘매트릭스’가 새로운 이야기로 돌아왔다. 기계가 지배하고 있는 미래를 그리며 관객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다양한 철학적 논의를 불러일으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던 ‘매트릭스’ 시리즈. 그러나 함께 영화를 만들던 공동 감독이자 자매(과거에는 형제)가 자리를 비워서일까.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볼거리를 다시 선보이기보다 다소 난잡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그리는데 그치고 말았다.
‘매트릭스’라는 게임을 세상에 내놓으며 세계 최고의 게임 디자이너가 된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 그는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며 한바탕 자살 소동까지 벌인 적 있지만, 지금은 현실을 똑똑히 자각한 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다 여기며 살아가던 어느 날,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꿈 같은 현실이 그의 눈 앞에 펼쳐진다. 평범한 일상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 두 현실 속에서 토마스 앤더슨은 운명처럼 빨간 약을 다시 삼킨다.
영화 ‘매트릭스: 리저렉션’(감독 라나 워쇼스키)은 인류를 위해 운명처럼 다시 깨어난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더 진보된 가상현실에서 기계들과 펼치는 새로운 전쟁을 그렸다. 부활, 부흥을 뜻하는 부제 리저렉션(Resurrecrions)처럼 라나 워쇼스키 감독은 SF 영화의 전설을 20년이 지나 다시금 부활시켰다. 기존 트릴로지의 주연을 맡았던 키아누 리브스와 캐리 앤 모스가 돌아와 다시금 네오와 트리니티를 연기했으며, ‘아쿠아맨’의 야히야 압둘 마틴 2세, ‘왕좌의 게임’의 제시카 헨윅이 주연을 맡았다.
기존 ‘매트릭스’ 시리즈가 찬사를 받았던 부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센세이셔널한 시각효과와 액션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과 함께 모더니즘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먼저 시리즈 첫 편에서 ‘매트릭스’는 멈춘 동작을 360도 방향에서 보여주는 등 기발한 촬영 기법을 선보이며 박수를 불렀고, 2편과 3편에서는 게임 ‘스트리트파이터’를 연상시키는 듯한 속도감과 박진감을 모두 챙긴 액션을 선보이며 후대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다소 이해가 어려워 관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매트릭스’ 시리즈는 비현실과 현실, 선택과 운명, 합리주의와 다원성의 논쟁을 담아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20세기를 보냄과 함께 포스트 모더니즘을 맞이하는 작품으로 ‘매트릭스’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렇게 다양한 족적을 남겼던 ‘매트릭스’ 시리즈였던 만큼, 라나 워쇼스키 감독이 부활시키고자 했던 ‘매트릭스’의 새로운 이야기에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있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귀환이라는 소식이 기대를 불렀고, 더 이상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과욕이진 않을지 우려가 샘솟았다. 결과적으론 우려했던 바가 맞았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제목에서 언급한 ‘부활’이라는 거창한 뜻에 미치지 못했다. 되레 영화는 여지 없이 확실하게 시리즈 역사 속으로 퇴장시켰다.
먼저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일전의 시리즈와 같이 혁신적인 연출이나 화려한 비주얼을 선보이지 못했다. 식상하고 진부한 액션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만났던 모양새를 다시 한번 스크린에 옮겼을 뿐이다. 과거였다면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만족시켜줬을 법한 연출이지만, 말했다시피 ‘과거였다면’이다. 20년 전에서 ‘매트릭스’의 연출과 비주얼은 그다지 나아간 면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여전히 영화의 분위기를 오리엔탈리즘이 좌우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스크린 가득 일본어로 채워지는 초록색 홀로그램부터, 신비로운 호수 위 떠 있는 동양 풍 도장, 총이 아닌 쿵푸로 싸우는 네오와 트리니티까지 영화는 1990년대 할리우드가 동양을 바라보던 관점 역시 그대로 재현해놨다. 다양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자, 감독 스스로가 다양성의 상징과 같은 트렌스젠더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요소가 여전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편 영화의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는 올해 2월 개봉했던 ‘몬스터 헌터’에서도 동양인 캐릭터가 백인 여성에게 초콜릿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계속해 다양성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하는 여타 할리우드 배급사들과 달리 논의가 더딘 모양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기존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었던 깊이 있는 철학과 쟁점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존 시리즈가 합리주의와 다원주의간 전쟁을 그리며 하나의 진리, 획일성 등을 배격했다면,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감독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지향점 조차 정리하지 못한 모양새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가 난해하다거나 복잡성에 기인한 이유가 아니다. 난해라기보단 난잡한 구성과 서술이 혼란과 짜증을 야기한다. 다양했던 논의 지점은 흔히 말하는 ‘개똥철학’으로 전락해 관객을 가르치려 한다.
요컨대 전설이었던 기존 시리즈의 이름값에 전혀 걸맞지 못한 안타까운 후속편이 되겠다. 함께 공동으로 연출했던 자매가 이번에는 없었기 때문일지, 재능이 한계에 달한 이유일지, ‘매트릭스: 리저레션’에서 과거 만났던 참신함이나 혁신성은 만날 수 없다. 20세기에 종언을 고했던 ‘매트릭스’는 어느새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버렸다.
개봉: 12월 22일/ 관람등급: 15세이상관람가/감독: 라나 워쇼스키/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 앤 모스, 제시카 헨윅, 닐 패트릭 해리스, 제이다 핀켓 스미스, 야히아 압둘 마틴 2세, 조나단 그로프, 프리앙카 초프라/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러닝타임: 147분/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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