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네가 많이 봤다고 생각해?
"넌 아무것도 몰라. 긁?"
본디 겉으로 '척'하는 것과 달리 내면에서부터 교만함이 넘실대는 스스로에 대해 경계하길 수년 째지만, 요즘과 같이 나의 교만함을 통감한 것은 퍽 오랜만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스스로 오타쿠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근 십 수년의 믿음이 단숨에 깨졌다는 의미다. 나는 '혼모노' 선배들 앞에서는 한없이 무지몽매한, 지극히 평범한 어린양에 불과했다.
업계 곳곳에 숨어있는 오타쿠들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박해의 시선에 조금이나마 대응하고자 했던 몇몇 선배들 덕에 만들어진 업계 내 오타쿠 모임.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은 내가 어린 시절 접했던, 오타쿠 꿈나무로서 계기를 심어주었던 작품의 근간에 어떠한 계보가 있던 것인지 일장연설을 해줬다.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사실 큰 감흥은 없었다. 고전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있던 탓이다. 근간과 계보라니. 단순한 서브 컬처에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의미부여란 말인가. 그 시절 작품을 내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공부하듯 과거의 촌스러운 작품을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선배들의 강권을 마냥 흘려보내기엔 이들이 얼마나 진심인지, 모임을 통해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들의 추천을 따라, '정석'을 훑기 시작했다. (사실 다음 모임에서 그들에게 당당히 '봤지만 노잼'이라고 말하고 싶던 것이 가장 큰 동기였다)
그리고 이제 시인한다. 나는 교만하고 멍청한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문화 산업에 있으며 이와 같은 고전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 대한 큰 아쉬움을 느낀다. 현재 내가 향유하고 생성하고 있던 콘텐츠들의 근간을 보다 폭넓게 살펴보려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내게 반성을 요한다. 나는 어느샌가 고전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잊고 있던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작품들보다 오히려 세련된 포인트도 여럿 있었고,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깊이감은 궤를 달리한다 표현하여도 충분할 지경이었다. 현재 작품들의 기법이나 구성이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그 시작점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통해 보는 이와 소통하였는지, 그토록 오래된 작품들임에도 감탄의 연발이었다.
감명의 시간에서 벗어나 조금 진정되고 나니, 이 깊은 울림과 뒤늦은 깨달음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내가 선배들로부터 교훈을 얻고 길을 안내받았듯. 후배들을 위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과거의 작품을 찾아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에. 선배들이 추천해 줬던 대로, 오타쿠가 되고자 하는 꿈나무들을 위해 우리가 필독해야 할 '정석'을 가볍게 풀어보고자 한다.
자세히 살필 순 없을 것이다. 그저 중요한 작가의 대표작만을 나열하며 독후감 따위나 남기게 될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서브컬처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라면. 앞으로 나열할 이 작품들을 접해보는 것 만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임을 감히 단언하며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세상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만화. 나 스스로가 만화로 시작해 현재의 일을 하고 있듯. 만화의 정수를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단순한 오타쿠 배양을 넘어 누군가가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