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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씨네 WeeCine Aug 09. 2024

# 1. 아다치 미츠루 | 'H2'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중2 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록밴드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고백'. 03년 발매된 이 노래는 당시에도 큰 인기를 끌었고, 영화 '클래식'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많은 이들의 설명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이 노래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정말로 찌질하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도 어렵지만, 어딘가 괜히 귀엽고, 공감 가는 가사에 있다 여긴다. 그리고 이 가사와 노래가 갖는 감정이 바로 일본 만화계의 거장 중 한 명인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H2'에서부터 시작한다.

H2의 한 장면

'H2'는 요컨대 야구를 소재로 한 청춘 드라마다. 사실 이는 'H2'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 '터치', '러프' 등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지만, 'H2'만을 꼽아 플롯을 아주 짧게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두 남녀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으나, 서로를 너무 오래 알아왔고 이성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소년은 소녀를 자신의 가장 친구에게 소개해줬고, 둘은 사귀게 되었으나, 소년은 뒤늦게 소녀를 좋아했음을 깨닫는다. 이후 소녀 역시 자신을 아껴주는 소년의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소년의 마음에 잠시 흔들리고 만다.


델리스파이스의 노래와 같이 소년 소녀, 친구, 소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소녀까지. 네 고등학생의 마음은 독자는 물론 주인공 자신들 역시 쉽사리 정의 내리지 못한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인지, 좋아는 하는 것인지, 상대방은 어떤 것인지, 우정과 사랑은 양립할 수 있는지, 두 소년이 맞붙는 경기에선 누구를 응원해야 할 것인지.


이렇게 지지부진 헷갈리고, 어쩌면 답답하기까지 한 이야기의 끝에서 결국 네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나간다. 삶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태도를 배우고, 상대방을 마주할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성장하고, 나아간다.


언젠가 이름만 들어봤을 뿐, 조금도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을 본 적 없던 나는 그의 대표작 'H2'를 몇 권 보는 것 만으로 단숨에 나의 완전한 패배와 교만함을 시인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두 장 넘겼던 나는 단숨에 그의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물을 표방한 아름다운 청춘 스케치는 퇴근길 순댓국과 소주 한 잔에 위로받는 아저씨에게 너무나 큰 감명을 남기고 말았다. 


절제된 컷의 호흡과 공간의 여백, 극 중 인물의 시선을 통해 극대화시키는 극의 긴장감과 몰입도. 그만의 특정한 리듬으로 만들어내는, 조용한 듯 뜨겁게 타오르는 연출은 직접 보여주지 않더라도 청춘의 한 장면을 부드럽게 연상시킨다. 1992년부터 연재됐던 작품이지만, 근래 만났던 어떤 영화보다도 담백하면서도 세련되다. 

메인 무대인 경기장에서 벗어나, 대사 한 줄 없이 주인공 팀의 승리를 보여준 숨 막히는 연출

이와 같은 스타일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서정적인 감성과 특히 어우러진다. 사춘기 고등학생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무작정 폭발시키거나 억누르는 일 없이, 그를 부끄러워하거나 강제로 성장시키기 위해 닦달하고 가르치는 일 없이, 한 단계 씩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면서도 유려하게 그려낸다. 이야기 시작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의 감정선들은 지극히 섬세하게 다가와 어느새 나와 완전한 공감대를 형성해 버린다.


그러나 연출과 캐릭터 보다도 'H2'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지점은 모든 인물이 성장한다는 지점에 있었다. 모든 작품에는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서든, 성장을 시키기 위해서든 어떠한 목적을 가진 기능적인 인물들이 필수적으로 있기 마련이다. 'H2' 역시 그와 같지만, 그러한 인물들을 버린다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도 서사를 부여해 함께 성장해 나가도록 해 줬다.


이들이 성장하는 시점에서는 주인공에 몰입하고 있었을지 언정 크게 긍정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이라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좌절하고 조연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이라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이들의 모습이 크게 기꺼울 수밖에 없을 터다. 응원하게 된다.

위트 있는 대사지만 근래 우리 사회에선 걱정되는 포인트기도 하다

'H2'를 대표적으로 들어 소개했지만, 아다치 미츠루의 또 다른 대표작들인 '터치'와 '러프' 역시 대단한 명작들이다. 대사가 없이 그림만으로도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툭툭 던지는 대사 하나가 다양한 의미를 담아 때론 애틋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지점들의 모든 원류가 아다치 미츠루라고 단언할 순 없을 터지만, 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로서 뒤늦게 이를 접했다는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인 듯하다.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의 작업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한 이유다. 오타쿠가 되고자 하는 나와 같은 이가 있다면, 아다치 미츠루의 'H2'를 비롯, 그의 작품을 하루빨리 읽어보길.

#. 다만 '미유키'는 여러 이유에서 허들이 높아 차마 독파하진 못했다. 언젠가 다시금 도전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서적 괴리가 다소 크다.


#. 1990년대 일본의 패션은 현재 우리와 많은 유사점이 있는 듯하다. 패션에 대해 무지하지만, 인물들의 스타일과 색감이 참 예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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