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셔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요즘 들어 하루에 30분 이상은 꾸준히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걷기. 그동안 너무 혹사를 했던 탓인지, 삼십 대 중반도 안 되었는데, 허리 통증이 심해져 걷기 치료를 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아파트 안에 있는 헬스장 러닝머신에서 천천히 걷기를 했었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지루했다. 가능한 그렇게 느끼지 말라고 앞에 TV도 켜고, 귀로는 신나는 음악을 재생해도 30분 이상을 걷는 것은 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일하다 조금씩 짬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시간 무언가를 조금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 하는 일이 자영업이다 보니, 시간을 내 편의에 맞게 사용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음악도 없고, 스마트폰도 주머니에 넣은 채로 걷다 보니 스쳐가는 것들이 생각보다 흥미롭다. 물론 별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동네는 아니나 간혹 "이런 가게가 있었어?"와 같은 풍경이 종종 나타난다. 걷다 보면 틈틈이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과 카페도 수집된다.
새로운 걷기 루트를 탐색하던 중 어떤 오래된 아파트 근처 담벼락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붕괴위험, 다치셔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경고문이 아닌가. 사실 오래된 동네는 이런 류의 경고문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동안은 거의 차로만 이동해 왔던 곳이기에, 아마 보고도 쉽게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걷는 상황에서 보니 꽤나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러면 무너지기 전에 고치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섣불리 고치지 못하는 거겠지 싶다. 그러다 하필 노약자나 아이가 걷다가 담벼락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경고했으니 나는 모릅니다 하고 끝일까. 생각해 보니 건장한 성인 남성도 역시 위험하다. 최소한 골절일 것이다. 심지어 나는 건장하지도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생의 법칙 중 하나,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더라. 아무리 뒤로 미룬다 하여도 다가오기 마련이다. 특히 안 좋은 일은 더욱이 그랬다. 이가 시릴 때 양치만 실컷 해도 소용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보니 내 허리도 같은 상황이었던 게 아닌가. 다음 주부터 운동해야지, 건강 좀 챙겨야겠다고 스스로 매번 다짐했지만, 나는 허리가 저릿하고 골반의 신경통이 도지고 나서야 움직였다. 아 그렇구나, "아니, 그러면 무너지기 전에 고치면 안 돼?"라고 생각했던 일은 사실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무너지고 나서 가장 힘든 것은 나일 텐데, 내가 가장 무심했다.
어쩌면 지금 이 통증도 담벼락이 무너진 것이 아닌, "붕괴위험 경고" 정도 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알려줘서 고맙다. 이제 고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