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처음으로 해수욕을 했다. 내게 자연은 멀리서 감상하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내가 들어가 무언가를 해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수영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맞춰 해수욕을 하기로 했다.
남해 바다는 차갑고 깨끗하고 멋졌다. 부산 친구들이 사람이 많지 않은 해변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었고, 덕분에 사람이 아닌 자연을 만끽하며 해수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해변에 서면 발끝으로 내달아오는 파도의 크기와 위엄에 움츠리게 된다. 한두 번 바다수영의 경험이 있는 남편은 성큼성큼 바다로 뛰어들었고, 우리중 제일 겁이 없는 막내도 아빠를 따라 풍덩 빠졌다. 해변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서있는 건 나와 딸아이 뿐이었다. 우리는 거침없이 달려오는 파도에 하염없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이십여 분이 흘렀고,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내가 먼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저하며 힘없는 종잇조각처럼 바다를 향해 들어가면서 발을 헛디디고, 주저앉기를 수차례 거듭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니 파도가 내게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몸에 힘이 빠지니 파도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더 이상 무섭거나 두려워서 겁이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이 파도 위에 몸을 싣고 두둥실 떠다니고 싶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이런 맛에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는구나 싶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 없이 널따란 수영장을 독차지하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딸아이는 여전히 바닷가 가장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가장자리로 걸어 나갔다. 앞으로 갈수록 파도는 다시 거세졌다. 딸아이에게 가는 길에 몇 번의 파도를 맞았고, 주저앉아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아야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아이는 더욱 겁을 내었다. 그런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기보다 저기 안이 훨씬 안전해. 여긴 이렇게 휩쓸리기 쉽지만 저 안은 엄청 고요해.” 라고 말이다. 딸아이는 쉽게 말을 듣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눈앞에서 엄마가 파도에 고꾸라졌으니까. 우리의 실랑이 사이로 쉼 없이 물결이 쳤다. 우리를 찌푸리게 하기도, 슬며시 웃음 짓게 하면서.
결국 우리의 싸움은 나의 승리로 끝났다.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아이는 내 손에 반강제적으로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정말이네? 엄마 말이 맞네?” 신기하다는 아이를 붙잡고 이번엔 파도 타는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 “파도 온다! 자, 두둥실 놀이기구 타는 거야. 알았지?” 파도라는 말에 아이의 눈빛은 금방 두려움에 가득해졌다. 무섭다는 말을 채 꺼내기 전에 파도는 우리를 태우고 춤을 추었다. 두려움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희와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엄마! 정말이네? 진짜 재밌네!” 호기롭게 웃는 내 얼굴과 막 새 장난감을 받은 아이의 얼굴로 물결이 일렁였다.
나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이와 처음 해수욕을 하게 된 순간, 아이의 손을 잡고 파도를 처음 타며 놀았던 그 시간, 파도의 온도, 우리의 웃음, 저 멀리 보였던 하늘가 바다끝의 모습까지 말이다. 파도는 쉴 새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고, 우리는 다가오는 파도의 얼굴을 마주보며 표정을 살폈다. 파도는 항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성난 듯이 보이기도 하고, 부드러운 개구쟁이처럼 보였다. 파도가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진 건 아니었다.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바다의 깊고 넓음을 체감할 수 없고, 바다의 가장자리에 서면 파도의 성난 모습만 보게 된다. 파도를 타려면 발이 닿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한다. 내 의지와 힘이 없어지는 곳에 다다르면 파도는 더 이상 성난 얼굴로 마주보지 않는다. 삶은 여러 번의 굴곡을 만든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으로 원만한 곡선을 그리기도 하지만, 세차고 험한 바람 탓에 고꾸라질 것만 같은 곡선을 그리기도 한다. 때때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곡선이라도 그 안에 있으면 의외의 즐거움이 발견된다. 그리고 오히려 안전하기까지 하다.
때때로 인생은 커다란 파도를 일렁이며 이리저리 끌고 갈 때가 있다. 그럴 땐 허리를 곧추세우고 전투태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흘러가는 물결과 춤을 추다보면 넘실넘실 넘어가는 곡선에서 전엔 알 수 없던 광경까지 얻게 된다. 깊은 바다 안으로 들어가야하는 타이밍이 왔다. 자꾸만 뒷걸음질하는 내게 그 날을 상기시키며 말한다. "파도 온다. 이제 두둥실 놀이기구를 탈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