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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기이택생 Nov 23. 2021

보는 재미가 있는 친구를 만났어

편지로 전하는 관계에 대한 내 생각

기윤이에게.


잘 지내고 있어? 미국에 온 이후로 네게 처음 보내는 메일이네. 카톡으로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시차도 있고, 조각조각 보내는 글 파편보다는 묵직한 문단으로 너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는 게 내 지금 기분과 더 어울린단 생각에 이렇게 글을 써.


가끔은 네가 보고 싶어서 눈을 감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때가 있어. 너와 함께 대학원을 다니고 룸메이트를 하면서, 너를 바다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어. 잔잔한 파도로 밀려와 나를 너무도 쉽게 무너트리고, 그렇게 무너진 내가 끝없이 원망해도 너른 품으로 보듬어주고. 삶을 살아내며 쌓인 눈물을 네 앞에서 쏟을 때면 이유도 묻지 않고 밤새 안아주는 네가 정말 고마웠어. 눈물을 멈추려 내가 너를 어찌나 꽉 안았는지, 네가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네 등 광배근에 난 빨간 내 팔 자국이 보일 때면 그게 그렇게 좋더라.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 낼 수 있구나, 내가 상처 내도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얼마 전에 바닷가로 여행을 다녀오고 느꼈거든, ‘역시 사람은 종종 바다를 보며 꽉 채워진 가슴을 비워내야 해’라고. 내게 너는 그런 바다였어. 그건 내게 있어서 가족도 애인도 못 해주는,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었지.


애인과는 사랑이라는 이해관계가 성립했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부모님은 나를 낳으셨으니 키워야 하는 관계가 되잖아? 이해로 맺어진 관계는 쉽게 단단해지지만, 동시에 그 이해력이 버틸 수 있는 만큼만 유지될 수 있는 것 같아. 애인은 날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해주는 거고, 부모님은 나를 키울만하니까 키우시는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사랑할만하지 않거나 키울만하지 않아지면 언제든 관계가 끝날 수 있다 느꼈지. 그런데 우리는 친해진 이유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에서 출발하지 않았잖아? 뭐 기껏 생각해봐야 옆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거나, 신입생 환영회 때 말이 잘 통했다 정도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친해져서 우리가 왜 친구인지 잘 모르겠으니까, ‘네 앞에서 내가 가끔 무너져내려도, 그 알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사이를 지켜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했어. 그래서 애인이나 부모님 앞에서는 내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늘 강한 사람이려 노력했고, 네 앞에서만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낸 채로 무너져 내릴 수 있던 게 아닐까.


결국 나는 관계에 대해 늘 회의감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나 봐. 누구든 나와 함께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사라지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난 늘 관계를 혐오하며 내 곁의 사람들에게 ‘어차피 당신도 언젠가 나를 떠날 거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어했어. 단 한 명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내 곁에 평생 있어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헛된 기대를 품고 살았지. ‘영원한 관계’에 대한 망상과 갈증이라고 해야 하려나? 내가 네게 그토록 기댔던 건, 넌 내 못난 모습을 가장 많이 봤음에도 내 곁에 남아준 친구였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 삶에 영원한 관계가 단 한 명 존재한다면, 그게 혹시 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어.


내가 연애를 오래 지속하지 못해 계절마다 새 애인을 사귀거나, 부모님과 명절에나 겨우 뵙는 사이가 된 건 말야. 또, 일을 함께 하느라 모인 연구실 사람들이나 취미를 공유하는 동아리 친구들에겐 사적인 마음을 주지 못했던 계기도 그렇고. 사실 절대 그 사람들이 싫어서 그런 게 아냐.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나를 떠날 거란 두려움. 모든 관계는 아무리 마음 주어도 결국엔 깨지고 말거라는 회의감. 그 때문에 내 마음을 언제부턴가 굳게 닫아둔 것 같아. 애초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반드시 깨지고 마는 숱한 관계나 떠나가는 사람에 아파 할 이유가 없을거라고 생각한 거지.


내가 자살 시도를 해서 부모님이 기숙사에 찾아온 날을 기억해? 방에 있던 너를 함께 데리고 우리 부모님이 점심을 사주셨잖아. 그 때 어머니가 내게 처음 한 말씀이 ‘아예 죽어버리지 그랬냐?’ 였지? 너를 옆에 두고 어머니와 또 한바탕 싸우는데, 어찌나 창피하던지. 그런데 그날 밤에는 창피함보다 두려움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아. 나와 가족의 못난 모습을 본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밤새 잠들지 못한 채로 곯아떨어진 네 등을 보며 울었거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아. 아무리 친한 친구도 전혀 다른 세상에 살다 보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경우가 많더라. 무턱대고 미국에 유학을 와 있자니 너와도 그렇게 멀어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 타지에 홀로 생활하는 외로움보다, 너와의 관계가 엷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나를 더 외롭게 해. 그래서 내 마음에 그렁그렁 맺힌 그리움을 적어 네게 보내. 이런 말들이 너를 너무 당황스럽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편지가 바다를 건너 네게까지 잘 도착할진 모르겠지만, 이메일 속 똑같은 글씨체보다 직접 손으로 적고 우표를 붙여 네게 내 생각을 보내고 싶었어. 잘 지내고, 종종 연락하자. 나 한국 가면 꼭 보고.


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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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이에게.


미국에서 생활하려니까 가끔 누군가를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친구는 영원할 거라고, 너라면 직접 만나진 못해도 언제든 연락해서 나를 다 풀어헤쳤다가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생각보다 그러기 쉽지 않더라. 왜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아무 이유 없이, 내 징징거림을 들어달라며 연락하기가 껄끄러워졌어.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 분명 너 때문은 아니야.


이렇게 말해도 너는 분명 내 변화를 걱정할 테니까, 위안이 될만한 소식을 하나 알려줄게. 최근에 학교 한인 스탠딩 파티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어. 이름은 최도은이야. 이니셜로 하면 CDE, 알파벳 순서대로. 재밌지? 작은 키에 허리까지 오는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걸음걸이가 초초총총 하는 식이라 머리카락이 폴랑폴랑 하는 게 참 보는 재미가 있어. 그 친구는 비누 향이 나는데, 정작 자기는 몰라. 그래서 내가 그 향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려 하면 호기심 잔뜩 어린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져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데, 그 눈은 정말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그 친구는 망막이랑 코 끝, 입술 끝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동글동글한가 봐. 빛을 받으면 유달리 반짝반짝하고 빛나는데, 그 친구가 웃으면 그 빛도 따사하고 뾰투룽하면 그 빛에 눈이 시려. 그래서 계속 웃게 만들고 싶더라.


우리 함께 기숙사 침대에 누워 빔 프로젝터로 영화 비포선라이즈를 봤던 날 기억해? 네가 어릴 때나 내가 대학생 때 각자 살아본 적 있는 파리의 풍경이 영화 내내 나와서 즐거워했고, 그 풍경 속 두 주인공이 수많은 주제를 오가며 끝도 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너무도 멋있어 했잖아?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일박이일 동안 서울지하철 2호선 한 바퀴를 걸으며 내내 대화도 해 봤고. 양발에 물집이 다 잡혀갈 즈음, 결국 영화는 영화고 사람은 그렇게 끝없이 대화할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런데 반짝이는 그 친구의 눈코입이 계속 따스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끝없이 대화하며 그 친구를 웃게 하고프니까, 쓸데없는 말이라도 일단 뱉게 되더라고. 파티 끝나고 내 방까지 함께 걸어오며 끝없이 시답잖은 얘기를 했어. 방에 다 도착해서는 괜한 핑계를 대고 근처 천변을 걷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내 방에서 한참 떨어진 그 친구 집까지 바래다주고.


두 시간은 얘기한 것 같은데 사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잘 안나. 내내 이 친구의 눈은 어쩜 그리도 반짝일까, 이것만 생각하며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동공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거든. 결국 영화에서 제시와 셀린이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둘이 뭐 대단한 이야기꾼이었거나 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첫눈에 반해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인가 봐. 나는 제시가 셀린에게 첫 눈에 반했을 거라 생각해. 아무튼, 그 친구랑 얘기를 잔뜩 하고 나니 가슴이 좀 후련해지더라. 방에 들어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면서, ‘저 친구는 내게 바다 같은 사람은 아니어도 대나무숲 같은 사람일 수는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 앞으로도 종종 내 마음속 얘기를 풀어내러 찾아가고 싶단 생각 말이야. 여자친구도 아닌 아이 얘기를 이렇게나 적어대다니, 나도 타지에서 오래 생활하더니 많이 센치해졌나 봐.


네 바뀐 메일 주소를 보니 또 문득 부러워. 나는 아직도 학교를 다니는데 너는 벌써 어엿한 직장인이라니. 내가 언제 한국에 들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건강하게 돈 많이 벌어둬. 꼭 크게 얻어먹으러 갈 테니까.


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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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이에게.


한국도 코로나로 난리라는데 건강은 괜찮아? 그래도 여전히 회사 잘 다니고 있지? 우선 이렇게 결혼 소식을 편지로 전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우리 과 계모임 친구들 모두 바라는 결혼식의 형태가 비슷했잖아. 진짜 친한 친구들만 초대하는 파티 겸 스몰웨딩. 해외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면 식장에 올 비행기표며 호텔 숙박비까지 다 주겠다고 했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어보니 편지 한 통 보내는 정도가 전부네. 미국까지 올 필요는 없어. 우리 다들 바쁘잖아.


그래도 내가 너에게 먼저 청첩장을 주게 될 줄이야. 인생 모른다는 말이 참 맞아, 그치? 나는 늘 결혼은 연애의 끝이 아니라고, 결혼은 현실의 문제라서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너무 늙기 전에 결국 급 맞는 사람끼리 소개받아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말할 때마다 너희들은 내가 아직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 말하는거라고 했었잖아? 막상 도은이와 몇 번의 만남만에 은이라 부르는 사이가 되고, 연애를 하다 또 자연스레 결혼까지 하게 된 걸 생각해보면 내 가치관도 틀린 것이긴 한데, 그렇다고 너희들 말이 맞는건 또 아닌것 같아. 딱히 지금도 은이와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거나, 이전 여자친구들보다 은이에게 특별히 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하진 않거든.


단지,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내 세상이 조금 더 재미있겠구나. 그리고 그 재미와 행복이 앞으로도 크게 바뀌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 은이를 웃게 만들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을 보는 게 재미있고, 그렇게 하려고 시답잖은 얘기를 해대며 자꾸 말이 꼬이는 내 모습이 웃기고, 그 모습에 더 크게 웃는 은이를 보며 안도하고 스스로를 내려놓게 되는 내 모습이 행복했어. 그러다가 어느 날 은이가 ‘너는 왜 내가 웃을 때면 내 눈을 그렇게 빤히 쳐다봐?’라고 물었을 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말해버렸어.


은이는 내가 실제로 만날 때와 인스타그램으로 대화를 할 때 너무 다른 사람인 것이 좋았대. 메시지로는 그렇게 말도 잘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얘기를 할 때면 몇 시간을 재잘거리는데, 만나기만 하면 얼어붙고 서툰 소리를 하기 십상이니까. 처음에는 그게 찐따 같았대. 그런데 나를 좀 알고 보니 ‘자기만 보면 얼마나 두근거리길래 저럴까? 나를 많이 사랑해주나 보다.’ 라는 생각에 그 모습도 사랑스러워졌다고 해. 사랑의 힘이 참 대단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반대로 데이트가 끝난 후 밤에만 만나는 채팅창 너머의 나는 너무 지적이고 멋있어서, 사실은 그 ‘또 다른 나’를 만나려고 나와 낮에 데이트를 해줬던 거래. 주말이면 밤새 메시지로 대화 하느라, 막상 데이트하는 중엔 서로에게 기대어 졸다 버스 정류장을 두 개나 지나친 적도 있어. 정류장 간격이 30분은 족히 넘는 미국에서 말이야. 이제 나는 은이가 좀 편해졌는데도 어쩔 수 없이 여전히 긴장한 척을 해. 턱을 괴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듣다가 일부러 팔꿈치를 책상에서 미끄러트린다거나.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꺄르르 하고 은이가 머리를 산들거리며 웃는데, 그 미소를 보면 이 친구와 영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돼.


그래도 아직 은이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두려워.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내가 은이와 함께 하고픈 이유가 잔뜩 있는 만큼, 은이도 나와 함께하고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나는 은이가 나를 떠나지 않게 하려면 그 모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은이 앞에서 난 절대로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네가 그리워져. 네 앞에서 쉽게 무너지던 어린 시절의 나도 함께 그립고.


결혼식은 가볍게 올리기로 했어. 부모님과 처가댁은 미국에서의 결혼을 반대하셨거든. 둘이 한국에 언젠가는 올 테니 그 때 친척들 다 모아놓고 결혼식을 하라는 거야. 그런데 미국 살면서 부부가 되면 법적으로 이득 볼 게 많잖아? 혼인신고 먼저 하면서 기분 낼 겸 간이 결혼식 날도 잡은 거지. 부모님은 모르셔. 한인 파티를 주최했던 한국인 교수님이 주례를 서시고, 하객도 조촐하게 연구실 사람 몇 명만 부를 거야.


아무튼, 친척 다 모아서 결혼식을 한 번 더 하러 결국 한국에 조만간 다녀오게 생겼어. 한국 도착하면 전화할게. 얼굴 한번 봐. 기왕이면 은이도 같이. 이름만 결혼식이니까 오지 못하게 했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몰래 찾아오는 일 없도록 청첩장에 식장이랑 날짜는 지워서 보내니까, 절대 올 생각 말아. 한국 가서 보자. 잘 지내고 있어.


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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