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릴 Dec 29. 2019

우리가 연말에 하는 이야기들

191210


지난밤 네가 침대에서 팔을 감아 나를 안았을 때 너의 심장소리를 들었어.

내가 너의 품 속으로 파고들수록 네 심장소리는 쿵쿵 선명해지고, 나는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고 다짐했지.

그날 밤 너를 찾아간 건 네가 유일하게 나를 먼저 찾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거든.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사람들은 많은데 본인이 필요로 할 때는 사람들이 곁에 없다고 말하며 우는 베트남 친구의 등을 토닥이며

언제부턴가 그 그대들 조차 갖지 않게 된 나 자신을 발견했어. 언제부터였을까, 힘든 순간에 혼자 견뎌내는 게 당연해지는 게.

대신 나는 널 택했지. 절대 먼저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너를

우리가 알고 지낸 꽤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너는 나에게 무언갈 요구한 적도 기대를 가진 적도 없었고

그저 내가 뭘 하든 너는 손으로 턱을 괴고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잖아.

그니까 그날 내가 "모든  붕괴되고 있어"라고 말하고는 벌떡 너의 침대에서 일어난 건,

 다 너의 심장소리 때문이야. 쿵쿵쿵.  


191212


회식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멍청한 상사가, 더 멍청한 위의 상사를 두둔하며

"그분은 너무 똑똑해서 말을  못하는  같아"라고 말했다는 거야.

그 발상이 너무 진기해서 친구는 아무런 말대꾸도 하지 못했대. 멍청한 상사를 2명이나 둔 그 친구는 자꾸만 맥주에 소주를 탔어.

 

얼마 전에 책을 읽었는데 한국인의 주요 정서는 '억울함'과 '한'이라고 하더라. 그 억울함이 술을 마시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 우리는 억울한데 할 수 있는 건 그 키 큰 남자 점원을 불러 소주를 타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 술집은 맥주만 파는 대신 맥주에 소주를 무료로 추가해줬어. 소주를 페트병 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맥주잔에 소주를 직접 타주는 점원을 보며 나는 물을 페트병채 들고 다니는 유럽인들이 떠올랐어.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늘 이방인 같았는데, 파리에서 코펜하겐을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물을 1.5 리터 에비앙을 페트로 샀던 그 순간 나는 진정한 유럽인이었어. 자연스럽게 1.5리터를 사고, 공항 의자에 앉아 다리 사이에 무거운 배낭을 끼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나 스스로도 깜짝 놀라서 혼자 소리 내서 웃었다니까.



그때 나는 완벽히 혼자였는데, 지금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모르겠어.

회식 자리에는 나도 너도 없고 그저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지지.

역시 자리에 없는 사람 욕하는  제일 재미있어!라는 변명을 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 욕을 .

우리는 왜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여기에 있지도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 자리에서도 당신 생각이 났지. 당신이 여전히 가끔 그리운 걸. 하지만 아무리 술을 마셔도 당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너무 소중한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이제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한때 나에겐 당신이 정말로 전부였는데.


191217


"그날 이후로  생각한  있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놀라겠죠.  나 그날 이후로 자주 당신 생각했어요.

그날 그쪽이랑 자고 싶다고 말한 거 진심이었나 봐요. 아니면 그쪽이 나랑 안 자서 그게 계속 미련이 남는 걸지도. 그날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 뻥 차 버리고 며칠 전에는 벽에 세게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 당신 한 번 정도는 더 만나고 싶은데, 드라마에서처럼 패러글라이딩 하다가 토네이도에 휩쓸리는 정도는 되어야 우연히 당신을 마주칠  있는 건지.

어제는 당신이  꿈에도  나왔어요. 당신은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마주하고도 기척 없이 지나갔고 나도 당신을 모르는 척했죠. 


당신 도대체 어디서  하면서 지내요? 나랑  한번 정도는 마셔줄  있잖아요.


191213


금요일 밤 새벽 3시 광화문에서 카카오 택시를 켰어. 우리 집까지 2만 원 요금이 계산되길래 이 정도 금액이면 잡히겠지라고 생각했지. 담배 피우면서 택시가 잡히기를 기다리는데, 3개비를 다 피도록 하나도 안 잡히는 거야. 이럴 때만 연말인 게 느껴진다니까?


할 수 없이 심야버스 정류장까지 10분을 걸어갔어. 걷는 동안 술이 좀 깨니까 방금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을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이 찾아왔지. 으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싫더라. 그래도 이번 술자리에서는 별 실수 안 한 것 같아. 말할까 말까 고민이 들 때 술 한입 더 입에 넣는 걸 선택했거든. 새벽 3시 30분에 만차인 버스에 올라서니  술 냄새, 담배냄새, 고기 냄새, 토 냄새 등 30명의 각기 다른 식당 냄새가 섞인 버스 안은 따듯했어. 마치 냄새에도 온도가 있는 것처럼.


집에 들어가니 4시 30분 거실에 아빠가 있더라.  아빠는 나를 보고 , 시계를 한번 보고, 방에 들어갔어. 나는 얼른 씻고 잠이 든 다음날 어그적 몸을 일으켜 거실에 나가보니  엄마가

"아빠는 네가 야근하고   알더라!"

라며 비웃었어.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깔깔 웃으며 내가 정말 멀쩡히 들어왔나 보다 생각했지.


그런데 Y야. 나는 이 이야기가 계속 남는다? 아빠는 내가 새벽까지 야근하고, 돈도 많이 벌고, 그러길 바라는 거 같거든. 내년에 대학원도 가고, 집도 나간다니까 도대체 쟤는 어떻게 사려고 저러나,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러나 계속 고민이 드는데 나한테 말 못 하는 게 티 나거든.


나도 미래가 두렵지. 하지만 두려운 만큼 내 자신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있는데, 그건 내가 늘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그 확신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부지런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내 노력을 좀 봐달라고 말하는 욕심이겠지.


191220


곧 당신을 만나요! 저는 지금 호치민가는 비행기 안이고, 당신은 공항으로 마중나오겠다고 약속했죠.

휴가를 낼 때 직장 동료들이 어디를 가는지 물으면 호치민에 간다고 답했어요. 그럼 꼭 "호치민이 북이야 남쪽이야?"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매번 답할때마다 헷갈렸어요. 저는 호치민이 베트남 어디에 있던 아니 다른 나라에 있던 상관이 없었거든요. 제가 대답을 머뭇거리면 사람들은 "뭐야 어디가는지도 모르는거야?"라며 웃었지만, 저는 그저 당신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제일 중요했어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게 1년 전이더라구요. 그때도 저는 27이었고 지금도 27이지만 곧 28살이 된답니다. 당신을 처음 보면 무슨 이야기 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되요. 당신을 웃게 만들면 좋을텐데. 아 근데 저 몸이 좀 안 좋아요. 이 비행기를 타기 전에 출근을 했는데요, 아침부터 배탈과 심한 두통에 시달렸어요.  여행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하는 저를 보고 상사는 말했죠.

"회사를 벗어나면  괜찮아질거에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셔서 저는 위장약과 미가펜 5일치를 파랑색 캐리어에 담고 회사를 빠져나왔어요.


공항철도에 사람이  많아 캐리어를 한 손에 쥔채 서서 갔는데, 다른 한쪽 손으로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도 눈이 감길 정도로 몸이 피곤했어요.

급기야 열기운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죠. 다리와 손에 점점 힘이 빠져 캐리어를 붙잡고 있는 것도 버거웠어요.

그런데 홍대입구서부터 인천공항 제 1터미널 까지 수많은 역을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하나 둘씩 내리는데 제 앞에 앉은 사람은 일어나지 않는거에요.

그는 역에 도착할 때마다 핸드폰 영상에서 고개를 들어 역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였죠. 그 사람이 고개를 들면 제 기대감도 올라갔다가, 그사람의

고개가 떨어질 때면 기대감도 추락하는 걸 45분동안 반복했어요.


내가 참 운이 없네로 시작했던 투정은 (이번 12월 견뎌왔던 일들과 합쳐져) 왜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야라는 푸념으로 이어졌고,

오늘 출근하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았을텐데 계약직이 휴가를 길게 내기가 쉽지 않은 슬픈 현실 자각으로 이어지다보니,

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졌어요.

믿겨져요? 내 몸이 힘들어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게?

하지만 전 진심이었어요. 우리나라가 총기규제가 합법이었으면 총으로 이 사람을 쏘고 싶다.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죠.

이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단지 내가 운이 좀 없을 뿐인데 내 몸이 너무 녹아내릴 것 처럼 힘드니 이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순간 무서웠어요. 사람이 무너지는게 한순간 일 수도 있겠다.

몸이 너무 힘들면 쉽게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구나.


힘들게 도착한 공항안은 여행을 앞둔 사람들의 설램으로 가득차서인지 따듯했어요.

겨울 코트를 팔 한쪽에 걸치고 체크인을 한 후 타이레놀을 먹었죠.

출국심사 후 가장 가까운 의자에 쓰러지듯 누워서 몸이 나아지길 기다렸다가 간신히 이 비행기를 탔어요.


사람은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거. 그게 무서워요.

돈이없으면 몸과 마음 건강이 쉽게 해쳐지는 이 사회속에서

저는 미래에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회에게도 지구에게도 곧 만나게 될 당신에게도 무해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당신을 크리스마스에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이 힘든 여정을 택한 지금의 마음 잃지 않을게요.



191225


There is no point,
요점은 없어
that is a point
그게 요점이야
that’s how I love,
그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고
that’s what I love
그게 내가 사랑하는 거야


There is no point,
요점은 없어
that is a point
그게 중요한 거야
of loving you,
널 사랑하는 데,
of touching you
널 만지는 데에 있어서

there is no bad,
거긴 악도 없고
there is no good
선도 없어
things could get bad
언제든 뭔가 나빠질 수 있고
but I already knew
그렇지만 난 이미 알고 있어
so what’s the point of all the questions
그래서 이 모든 질문들의 요점이 뭐야
that’s not you should be wondering
네가 궁금해야 할 건 그게 아니야
so you could ask me
그러니 내게 물어봐

"how much you love me?"
날 얼만큼 사랑하는지


- 백예린  point   가사 발췌


작가의 이전글 죽고 싶다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