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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Dec 06. 2020

마스크로 인한 피부염,
아픈 내 몸을 받아들이기

5일째 집 밖을 전혀 못 나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자가격리는 아니고 마스크를 쓸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부터 눈 주위가 벌겋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눈 근처가 부었고, 친구들은 "마스크 쓰면 눈만 보이는데 눈이 그래서 어쩌냐" 하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부은 것보다 가려운 게 힘들었다. 피부과를 여러 번 갈 때마다  의사들은 마스크 착용으로 코와 입술 쪽 습도가 높아지고, 이로 인한 열기가 위로 올라온 것이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도 나아지지 않자 동네  피부과 의사는 진단서를 써주며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마스크가 원인인 것 같지만 지금은 마스크를 안 쓸 수 없으니, 큰 병원에서 정확히 알레르기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대학병원의 가장 빠른 예약은 2주 뒤였고, 그 2주를 기다리는 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눈은 팅팅 붓고 얼굴은 따가워서 로션을 바를 수 조차 없는 얼굴과 마주하고 만다. 그날 아침 얼굴이 너무 아파서 한바탕 울었지만, 회사는 꾸역꾸역 출근했다. 얼굴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 내가 또 서러워서 눈물 한 방울 흘리고, 결국 1주일 간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어쨌든 최대한 마스크를 쓰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날 회사에서 돌아온 뒤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가려운 얼굴로 집에서 사투를 벌이다  허리마저 삐끗했고, 가려운 얼굴과 아픈 허리를 싸매고 누워있으니 또다시 화가 났다.


나는 왜 이럴까, 내 체력은 왜 이리 엉망인 걸까. 어떤 걸 더 조심했어어야 하는 걸까, 코로나가 내 탓은 아니지 않나,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다 마스코 쓰고 잘 지내는데 나는 왜 이러나. 내 피부는 왜 이렇게 예민한 거야? 자주 아프니까 너무 민폐 같아...  하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작년 12월부터 아픈 일들이 많았다.  

작년 12월 A형 독감으로  시작해 어금니 치료, 1월에는 급성 맹장염, 올해 피부염에 그 사이 2번 무너진 허리까지. 회사에서 나는 체력이 약한 애로 찍혔다. 이 정신없는 과정 속에서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우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일정이 번거롭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어쩌죠 낫지를 않네요 죄송해요' 아픈 몸을 이야기할 때마다 꼭 뒤에는 '죄송합니다'를 붙였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 미안했는데, 집에만 있게 되면서 가족들이 옆에서 나의 통증을 매시간 챙겨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한지희 작가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짚어 들었다. 나는 아파서 이렇게 미안하고 무서운데,  아파도 미안하지 않다는 작가의 선언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책은 '건강할 권리'를 넘어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한다. 저자는 '질병 낙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다양한 표준을 넘어 질병의 개인화를 주장하는 논리들을 비판한다.




질병을 둘러싼 차별적 말과 태도는 아픈 몸들이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하며 존중받을 권리를 제약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질병을 개인의 불행, 수치, 책임으로 귀속시켜 열등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중략)
문제는 우리의 아픈 몸이 아니다.
질병을 삶의 일부가 아닌 배타적 대상으로 만든 사회다.
 -p72-


그리고 이 책에는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초생활수급권자인 지적장애 3급의 한 청년은 맹장염 수술 시기를 놓쳐 복막염이 왔고, 수술 몇 시간 뒤 패혈증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맹장염을 방치한 건 병원비 때문이었다.  책을 통해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의료급여 대상자인데 '비급여 항목'은 똑같이 전액 자부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맹장염 확진을 받았을 때 의사가 나에게 '맹장염 수술 자체는 보험이 되지만, 맹장염 수술에 필요한 장비는 비급여 항목'이라며 40만 원짜리 기계 사용 동의 여부에 사인을 하도록 했었다. 나에게 40만 원은 그리 큰돈이 아니었고, 나는 큰 고민 없이 사인했다. 총병원비가 120만 원이 나왔을 때도, 아무 걱정 없이 계산했다. 수중에 그 정도의 돈은 부담 없이 쓸 수 있었고, 나에게는 80% 실비 보험이 있었으니까. 그 청년의 죽음은 청년의 탓이었을 까? 아니면 한국 사회의 건강보험의 한계였을까? 만약 한국이 무상의료 사회였어도 저 청년의 질병은 죽음으로 끝이 났을까?


종편 채널을 켜면 '식습관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라는 모토 하에 질병을 극복해 낸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개인의 질병에 있어 오로지 개인의 탓을 얼마 정도 일까? 질병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면,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노력은 중요하지만, 코로나 감염에 취약한 계층(밀집된 환경에서 장시간 근로)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코로나 확진자에 대한 지금과 같은 지나친 낙인과 배제는 환자들을 배타적인 존재로 만들 뿐이다. 코로나라는 질병이 가져오는 위험보다, 코로나가 가져오는 낙인이 더 무서운 시대에서 코로나 확진자는 본인의 일상을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까?  코로나 확진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분명 사회적인 문제다. 


하지만 생활습관을 바꿔 몸을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사실 한계가 명백하다. 주기적으로 대기를 가득 채우는 미세먼지, 방사능에 오염되었을지 모를 해산물의 유통,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환경 호르몬, '몰카'때문에 마음 편히 갈 수 없는 화장실, 불안정 고용으로 인한 해고 위협, 유해 물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생리대 등은 모두 시민의 건강을 해치는 위험 요소다. 이런 위험을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질병은 사회적 환경, 유전적 요소, 생활습관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해 나타나는 결과다. 질병의 발생 원인을 명확히 구분해내는 것은 쉽지 않고, 그 원인을 하나로 지목하기도 어렵다. p83


아픈 몸은  내 삶의 모든 감각이 머리라고 생각해왔던 착각을 여실히 무너뜨린다. 몸의 한 부분이 아픈 순간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그 몸 부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하루에도 수백 번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한다. 하지만 질병의 발생 원인을 명확히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저 이 아픈 몸과 함께 불안한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다들 조금씩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아픈 몸을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만,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미운 마음이 들지만, 그 누구보다 미운 건 나 자신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내 몸이 아프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마스크로 인한 피부염을 알고 난 후부터는 실외 인적이 없는 곳에서 잠시 마스크를 벗고 있다가 타인을 마주하고는 급히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그 사람들도 나처럼 마스크를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  타인에게 최대한 피해를 안 줄 장소를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아픔에 대한 죄책감과 비난을 타인과의 연결로 나아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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