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Vagabond Jul 24. 2021

나의 언어부터

Learn yourself first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나의 언어를 먼저 공부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오은영 박사의 영상을 보았다.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었고 남편은 한국인, 아내는 캐나다인인 다문화가정에 육아 솔루션을 제안해주는 클립이었다.


그만하라는 말에도 멈춰지지 않는 남매의 싸움에 엄마는 화를 냈다. 그만 하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억울함을 빠른 한국말로 호소하는 아이의 말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영어로 해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 아이는 "내가 영어로 하고 싶은 데 어떻게 하는지 몰로ㅓ앙- 흐앙-"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말을 듣던 엄마도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 감정에 공감했던 나도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오은영 박사는 육아 처방으로 아이들과 아빠, 그리고 엄마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라고 하였다. 너무 좋은 솔루션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의 언어를 배워주길 그토록 갈망했었던 나는 더욱 서러워졌다.


나도 외국인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본 적이 있다. 나는 상대의 나라에서 상대의 문화를 공유하고 상대의 언어를 사용했다. 내가 존중하고 이해하고 습득한 그 세계의 많은 것들은 표면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약화시켰다. 언어의 장벽이 한쪽으로 무너져갈수록 우리 사이의 기본값도 점점 치우치게 되었다. 언어라는 수면 아래 이방인이었던 진짜 나는 상대의 세상을 함께 살아가려고 가랑이가 찢어질 듯 뛰고 있었다. 평온하게 물에 떠 있는 오리의 발은 물 밑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던가. 우리의 여정은 어느새 감정의 지뢰가 매설된 전쟁터까지 와버렸고 누구 하나는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버텼다. 그리고 결국은 떠났다.


내가 밟은 지뢰는 영어로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서러움이 턱끝까지 차올라서 터져버린 아이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나도 그 세계의 알고리즘으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른다. 분명 동생이 내 기차를 뺏어가서 가져오려던 것이었다. 마치 이걸 엄마에게 해명도 할 수 없는 채로 싸운다고 혼나야 하는 아이처럼.


나는 불편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사과를 했고 내가 바꾸겠다고 했다. 상대에게 내가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상대는 이방인인데. 아랑곳 않은  그저 나는 상대의 세계에 빠져들기 바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강요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희석되기 어려운 색으로 다가갔었더라면 아마  좋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아이의 세계와 엄마의 세계가 만난 것이다. 아이들은 혼나면 스스로를 억누르고 혼났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매사에 논리적으로 사고한 후 내가 맞는 건 맞다고 주장할 수 있는 아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유사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희끗한 색이 되어 스스로를 물들이고 지워갔다. 고치고 바꿨다. 얼마나 그 세상을 동경했고 함께 하고 싶었으면.


아이는 엄마의 언어를 배워서, 언젠가는 분명 이건 내가 혼날 일이 아니라고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생이 내 기차을 뺏어가서 그런다고 말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영상 속의 아이는 충분히 똑똑하여 스스로의 언어는 잘 배워가고 있었다. 살다 보면 어른이어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잘못된 관계 형성이 누적될 경우 영원히 떠나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동경하는 세상이 생긴다면 스스로를 위해 조금 더 진한 색으로 첫 발을 내디뎌보는 건 어떨지.


나를 위해.

-나와의 일상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