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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un 21. 2020

80. Epilogue

(Week 52) 나의 구두, 나의 발걸음


복직을 앞두고 첫 출근날 신고갈 구두를 사기 위해 온라인 쇼핑몰을 뒤적거린다. 평점 높은 순, 리뷰가 많은 순 정도로 정렬을 하고는 몇 시간이고 뭐가 좋을지 살펴보지만 딱히 맘에 드는 게 없다. 좋은 제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스타일이 내게 어울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평에 의존하다가는 마음속 책정해 둔 적당한 가격선 맞추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늘 그래 왔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고 나서 보면 대개는 가장 평범한 제품들이다. 가장 무난한 놈을 찾아 몇 날 며칠을 시간 들여 검색했다는 사실에 헛웃음만 나오지만 그래서 나의 색깔이 회색, 그레이(Gray) 아니었던가.



1년간 휴직을 하고는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글도 써봤지만 나의 색깔은 여전히 그레이였다. 오히려 그 사실이 더 명확해졌을 뿐이다. 처음엔 한 꺼풀 들여다보면 오색찬란한 색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기대감을 갖기도 했지만, 사실 반년쯤 지났을 때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런 건 없다고, 기껏 발견한 조금 선명한 색이라면 블루(Blue) 정도라고. 멀리서 보면 웃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울고 있던 색.


차가운 블루, 우울한 블루.




모르던 내가 아니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일 년을 글을 쓰며, 그렇게 흔적을 남기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직 고르지 못한 새 구두도 결국엔 가장 무난한 놈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1년이 무의미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못 고르던 내가 싫고 답답했다면 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웃어넘긴다. 원래 꾸미는 데는 잼병이라고. 어디 가서 곁눈질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갖춰 입는 게 내 스타일이라고. 싫던 모습도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그레이 앤 블루. 온통 어두운 색감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반짝이는 찰나의 순간들은 존재하였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줄 때, 내가 누군가의 힘이 되어줄 때 비로소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관계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폭은 넓지는 않을지라도 그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잠시나마 나는 빛나는 사람이 된다.


가장 평범한 나의 구두를 신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을 시간이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찾아, 내 안의 빛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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