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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un 19. 2020

79. 인연

(Week 52) 관계의 연속성에 관하여


귀국을 몇 주 앞둔 어느 밤, 아내는 바다가 보고 싶다 하였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지도를 펼치고 가까운 바다를 찾아보았다. 조지아주의 애틀랜타에서 남쪽으로 300마일을 달리면 멕시코 만이, 동쪽으로 300마일을 달리면 대서양이 나온다. 비슷한 거리의 두 바다, 아름다움을 따지자면 멕시코 만이 단연 우월하지만 우리는 대서양으로 향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날 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5시간을 달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힐튼 헤드 비치에 도착하자마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윌밍턴에 사는 아이 친구의 엄마였다.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며, 우연히 전화한 거라 하셨다. 마침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잠시 놀러 왔다 말씀드리니, 근처에 온 김에 윌밍턴에 들러 얼굴 보고 갈 수 없는지 물어보셨다. 드넓은 미국 땅 기준에서야 근처라고는 해도 다시 4시간 반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한국인의 사고로는 서울 부산 정도의 거리다. 잠시 고민을 한 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우리 두 가족은, 아이와 친구는 결국 다시 만날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인연(因緣). 나는 이 말이 달콤하다.

무언가 가슴 벅찬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처음 인연을 믿게 된 것은 한 누나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2005년 나는 학부 졸업을 앞두고 국제경영 인턴쉽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청도로 향하였다. 당시 내가 일하기로 한 곳은 대한항공이었다. 하지만 청도 공항에서 나를 맞아주신 분은 다른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일인지 사정이 생겨 대한항공에서는 인턴을 받을 수 없다 설명하시고는, 대신 청도대학으로 가면 나를 맞이해주실 분들이 계실 거라 말씀하셨다.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날 나는 청도대학 내 한 사무실로 향하였다. 일종의 어학원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는데, 몇 분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누나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대학 10년 선배였는데, 애교심이 약한 나였지만 타국에서 만난 동문 선배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잘해 주시니 더더욱 그렇다.


인턴쉽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누나와는 종종 연락을 하며 지냈다. 누나가 한국으로 잠시 들어오실 때면 식사도 하고, 근황도 전해드리곤 했다. 그래 봤자 몇 년에 한 번 꼴이었지만 소중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그리고 누나에게도 있었나 보다. 하루는 종로에서 만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누나는 내게 공부를 더 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셨다. 사실 신입사원 시절 회사에 정을 못 붙여 대학원으로 도피해볼까 잠깐 생각해본 것 외에는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주제였기에, 막연히 "그것도 괜찮겠네요" 정도로만 말씀드렸다. 그때는 직장생활이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해외 MBA 프로그램에 선발된 것이다.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했고, 1년여 준비 끝에 조지아주의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Emory) 대학에 합격하였다. 2015년의 일이다. 오랜만에 근황을 전할 겸 누나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니 놀랍다며, 기쁘다며 축하해주셨다. 그런데 놀람의 포인트가 MBA만 있지는 않았다.


"잘됐네. 나도 애틀랜타야. 오면 얼굴 한번 보자."


미국에 계신 줄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애틀랜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국이라면 뉴욕, LA, 시카고 정도나 알았고 그마저도 지도 위에 찍어보라면 어디를 찍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기에 미국에 계신다 하면 미국이라고만 생각했지 어느 주, 어느 도시 일지까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찾아보니 미국에는 약 2만여 개의 도시가 있다고 한다. 전 세계 200여 개의 나라 중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그 나라의 200여 개의 대학 중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연으로 알게 된 사람. 다시 200여 개의 나라 중 다른 나라에 잠시 지내게 되었는데, 그 나라에 있는 2만여 개의 도시 중 같은 도시에서 다시 만나게 될 확률.


나는 로또를 맞은 사람이었다.




아내의 MBA로 다시 찾은 2019년의 애틀랜타, 그곳엔 여전히 누나가 있었다. 2005년 다섯 살 꼬맹이였던 누나의 아들은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고, 당시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나와 아내는 어느새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우연에 우연이 더해진 소중한 인연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내가 귀국하기 직전 누나는 캘리포니아로 넘어간 뒤라 비록 만날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게 아쉽지만은 않았다. 알 수 없는 설렘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잘 지내고 계세요 누나. 우리는 언젠가, 어디선가 또 만날 거니깐요."






윌밍턴에서 돌아오는 길, 장거리 운전을 하는 동안 나는 다시금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이의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처음 들어을 때만 해도, 나는 아쉽지만 아이들이 이제는 서로 만나기 힘들거라 짐작하였다. 그런데 작년에 한 번, 올해 한 번, 이렇게 두 번이나 만났다. 앞으로 더 만날 것이다.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만날 수 있었다.


힐튼 헤드 비치에 도착한 날, 만약 아이 친구의 엄마가 전화를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만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질문에 나는 자신이 없다. 시간은 조금 더딜지 몰라도 보고 싶은 이상 언젠가 다시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과,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보고 싶은 마음도 덜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머뭇거린 사이 스쳐 지나가버린 인연이 얼마나 되었을지, 결과적으로 내가 모르고 지낼 뿐 잃어버린 인연은 또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해보면 먹먹해지기도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미당 선생의 글이 떠오르는 밤이다. 거기에 감히 한두 줄 더해본다.


그리우면 속삭여보자, 당신이 많이 그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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