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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Feb 18. 2023

의문이 화가 되지는 않게

교회라는 이상한 나라에서 내 마음 지키기

3년 간 살았던 신혼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간다. 배우자가 새로운 교회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교회와 집, 동네 모두 변화가 생긴다. 요 몇 주 간 불안과 근심, 비판에 휩싸였다. 내 감정 변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남편을 따라다녀야 하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남편이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왜 집과 교회를 다 옮겨 다녀야 할까? 나 자신이 고리타분한 체제에 갇혀 있는 것 같아 괴로웠다.


결혼 초였다면, 이 질문은 내게 무게추를 단 뒤 밑바닥까지 나를 끌고 갔을 거다. 그리고 나는 화에 휩싸인 채 분노의 글을 썼겠지.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교회 세계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그 비판이 알맹이 없는 분노로만 커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이 흑안개처럼 생겨날 때쯤 한쪽에서는 그 마음에 시원한 물을 뿌리며 달래준다. 그 역할을 내 자신이 하기도 하지만 배우자의 역할이 크다. 배우자는 내 마음을 잘 받아주었다. 밤에 네 시간 동안 대화를 하며 내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에 유난이라 할지도 모른다. '사모라면 당연히 교회를 따라다녀야 하는 게 맞지, 사택 준다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내겐 이런 시스템이 의문 투성이다. '나는 앞으로 교회를 선택할 수도 없는 거야?' '나는 앞으로 내가 살고 싶은 집에서 살지 못하는 거야?' 이렇게 질문하니 대부분 대답한다. '원래 그런 거야. 네가 목사인 배우자를 선택했으면 감수해야지'. 개인의 선택이라며 불합리한 행태를 정당화하는 모습에 여전히 날이 선다. 아마 평생에 걸쳐 맞닥뜨려야 할 부분일 거다.


여전히 머리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용하기로 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잠시 숨을 고르고 흘려보내는 연습.




누군가 내가 예전에 쓴 글을 읽은 것 같다. 당시 교회에 대해 화가 많이 난 채 글을 썼었는데, 그 누군가는 분노에 찬 내가 안타까워 보인다고 했다. 분노한 '나'가 안타깝다기보다는, 내가 의문을 갖는 '교회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더 많이 느꼈으면 한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궁금증을 제기했으면 좋겠다.


내가 아무리 비판한다 한들 변하는 건 없다. 결국 나는 배우자를 따라 교회를 옮기고 이사도 간다. 달라지는 건 없지만 문제 제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이상한 세상이지만 어쨌든 흘려보낸다. 이런 나임에도 교회 세상에 나를 넣어놓으신 뜻이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나, 그래도 많이 성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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