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인식에 대한 투쟁
어릴 적 지방에 있는 가족묘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엄마 아빠도 나중에 죽으면 이곳에 묻힐거라 내게 설명해주시자, 나는 물었다.
“나도 죽으면 엄마아빠랑 같이 여기에 묻히는거야?”
엄만 답했다.
아니, 너는 출가외인이라 여기에 못 묻혀.
출가외인.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네 글자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고 의문점만 안겨주었다. 나는 그 단어의 뜻에 대해 질문할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대꾸없이 지나갔다.
출가외인(出嫁外人), 시집간 딸은 친정 사람이 아니고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 -
엄마에게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엄마는 “내가 그랬냐”며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그저 웃기만 하신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단어를 들었을 때의 풍경과 느낌, 상황이 모두 기억나는데 말이다.
유독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때의 에피소드가 생생히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그때 말한 ‘출가외인’이 되기 싫었던 나는 결혼 후 내 가족들에게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결혼 전보다 가족행사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혼 전에는 그토록 귀찮고 가기 싫었던 가족행사에, 결혼 후에는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배우자를 데리고 참석했다. 그리고 내 스스로 당당해했다.
이것 봐, 요즘은 장가를 ‘오는’ 거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구.
그렇게 2년 가까이를 보내다가 지금은 조금 지친 상태이다. 가족 간 유대감이 유독 끈끈한 전주 이 씨 집안의 가족행사에 모두 다 참여하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거기다 엄마 쪽 행사도 있다 보니, 일단 나부터가 매번 참석하기가 힘들다. 귀찮음이 밀려와도 ‘역시 딸은 결혼하면 얼굴 못 보는 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할 어른들의 모습이 상상되며 다시 마음을 잡게 된다. 그러다 문득 가족들을 더 챙기려는 내 마음이, 말도 안 되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조선시대 때나 통용되었던 말을, 이제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대부분이 알텐데, 나는 왜 이렇게 투쟁을 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어릴 적 경험한 작은 쇼크에서 오는 반기였을까. 여전히 연기처럼 우리 곁에 머무는 낡은 인식이 느껴져서일까. 어쩌면 나의 엄마가 여전히 나를 ‘출가외인’으로 생각할 것이 싫어서 그렇게 자주 집을 드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차별적인 옛 것을 부정하기 위해 내 자신을 너무 몰아칠 필요는 없다. 이미 결혼 초에 열심히 증명해 보였다. 피로함을 이겨가면서까지 하기에는 더이상 의미없고 낡은 사고니까. 이제는 조금은 편안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