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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27. 2024

모녀 이야기


눈을 감았다. 건조하고 찬 공기가 두꺼운 껍질을 투과해 속살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피곤이 겉옷에 얹혀 무겁게 몸을 눌렀다. 차마 정제되지 못한 투박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간지러웠다. 손 가는 대로 아무 곳이나 긁어보지만 딱히 가려운 곳을 몰라 붉게 생채기만 생긴다.


눈을 떴다. 향긋한 바람이 코를 간지럽혔다. 하얗고 붉은 꽃봉오리가 나른한 기운을 타고 일렁거렸다. 겉옷을 벗었다. 따스한 바람에 얇게 입은 옷이 하늘거렸다.


계절을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조금 전 바람과 전혀 다른 바람이 생겼다가 다시 사라졌다.


어느 놀이터 공원 벤치에서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며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어지러웠다.

기억을 더듬었다. 여자 아이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엄마가 낯선 사람하고 얘기하지 말라했는데…”

 쭈뼛대는 아이의 입술이 비현실적으로 일그러졌다.


눈을 찡끗하고 침을 꿀꺽하는 사이 아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을까,  너무 의아하고 믿을 수 없어서 눈을 세게 비비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네가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 누가 탔었나?’ 미끄럼틀이나 정글짐도 분주하게 움직이다 갑자기 멈춘 듯 어떤 열기가 와닿았다. 잠든 사이 시끄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이쪽을 향해 놀아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아니면 모든 게 꿈인지도.


무턱대고 집을 뛰쳐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아무 버스나 집어 탄 것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울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생각하기 싫었지만 기억이 났다. 그런데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그건 모르겠다.


“요즘 엄마 이상해.”


어디선가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이기도 했다.


“엄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핸드폰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찾고, 벌써 몇 번째인지,”


한숨을 쉬는 딸의 표정을 보았다. 엄마에 대한 불신과 못마땅한 표정, 그 순간 서운함과 억울함이 밀려왔다. 이해는 하면서도 그런 맘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너도 나이를 먹어봐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현관 도어 비번을 잊어버렸을 때도 ‘그럴 수도 있지’ 했다. 모아놓은 돈이 없어졌다고 온 집안을 뒤져도 나오지 않자 딸이 가져갔다고 의심하던 엄마를 향해 모진 소리를 했었다.


딸을 도둑으로 생각하는 엄마를 용서하지 못했다. 다시는 엄마를 보러 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오기가 생겨  다시 돌아가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구석지에 쳐 박아놓은 상자 안에 돌돌 뭉쳐 고무줄로 싸맨 지폐덩어리를 찾았다.

 

“엄마 이건 뭔데요? 정말 치매 걸린 거 아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놓고 쌀쌀맞게 돌아서 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가방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떨림을 더 부추겼다.  딸이었다.

톡도 문자도 셀 수 없이 많이 와 있었다.


“엄마 어디야? 무슨 일 있어?”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지치고 멍한 표정으로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 전 오빠와 의논해 엄마 치매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엄마는 화를 내면서


 “너한테 누명 씌어서 화가 났냐? 그건 오해다. 그렇다고 네 어미를 환자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 괜한 걱정 말아라.”


엄마의 기억력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금방 한 말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거나 마음에 안 들화를 내는 횟수도 늘어났다. 병원도 안 가려하고 사람들과 만남도 뜸해지고 모든 것에 무기력해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감기 치료를 핑계로 근처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병원에서 인지능력 테스트라는 걸 했는데 사물의 짝을 맞춰보거나 기억력 테스트 정도를 했다. 의사는 나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쯤으로 설명하면서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의사의 말을 믿고 싶었다. 좀 의심이 가긴 했어도 어느 정도 차이는 있어도 나이 들면 그러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엄마가 길을 잃어버리기 전까지.


엄마의 옷에 명찰이 붙여졌다. 그건 치매라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가슴이 쓰려 왔다. 기억이 거듭될수록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고,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봄이 왔지만 마음은 쓰라린 겨울 같았다.


‘나도, 나도 엄마와 같아. 기억을 잃어버릴 때가 많아, 이제 엄마 마음을 알 것 같아.’


엄마가 돼 보려고 했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다. 섭섭함도 억울함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억지로 그렇게 해 보려고 했다. 엄마를 생각할수록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더 기억을 잃어갔다.


술을 마시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길을 헤매면서 벤치에서도 잤다. 누군가에게 전화하면서 펑펑 울었고, 오랜 시간 연락두절로 가족을 애태우기도 했다.


엄마를 집으로 모셔오면서 나의 방황은 일단락됐다. 이제껏 오빠가 잘 보살폈지만 얼마간이라도 내가 모시겠다고 사정했다.


시간 되는 대로 엄마와 산보도 가고 놀이동산에도 가고 시장도 같이 다녔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릴 때도 있지만, 순한 양처럼 고요히 먼 곳을 바라볼 때도 많다. 이대로 엄마와 딸이 함께 늙어 가는 것도 꽤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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