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50미터쯤 앞으로 가면 언덕의 초입이었다. 언덕은 완만했다. 왼쪽으로 몸을 돌리니 빌라와 빌라 사이에 난 좁은 골목에 대략 30개 정도의 돌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는 딱히 목적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닌 이상 직진해서 갈 이유도 없었다. 그는 방향을 바꿔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랐다. 숨이 찼다. 그의 불쑥 나온 배가 심하게 움직였다. 계단이 끝나는가 싶더니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이 가파르게 이어졌다.
옆에는 무질서하게 자란 풀들과 작은 나무들이 뒤엉켜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몇 개의 운동기구가 하릴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터널 모양의 울타리 쳐진 등나무 시렁에는 이름 모를 넝쿨식물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곳이 어느 산의 초입길이란 것을 안내 표지판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낮이 길어졌다곤 하지만 이 시간에 산에 올라가는 것이 맞는 일일까? 요즘 그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뛰쳐나왔지만,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평일에 가끔 만날 수 있었던 친구도 얼마 전 취업을 했다.
그는 어떤 목표를 위해 국립 도서관을 전전하며 열심히 책을 읽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끄적거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흠칫 어깻죽지를 떨었다. 양쪽 어깻죽지 아래 겨드랑이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팔짱을 끼고 양쪽 겨드랑이를 긁었다.
그는 체념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미 해가 기울어진 마당에 산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을 나올 때는 사람 없는 곳에서 며칠이고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진지한 목소리와 직장 상사의 카랑한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말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이 진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원망과 분노가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마치 존중해 주는 듯, 염려해 주는 듯, 정말 어쩔 수 없이 말하니 이해하라고 관용을 베푸는 양 점잖게 말하면서, 봇물 터지듯, 이어지는 말 폭탄은 그의 정신을 송두리째 파괴시키고 마음 한가운데 검고 깊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울화병이 생긴 것도 우울증과 죄책감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도 뼈 있는 말보다 무심코 던진 말에 맞은 상처 때문이었다.
말문이 막힌 것도, 마음이 닫힌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말은 상처 난 그의 가슴에 바닷물을 삼킨 것처럼 쓰라린 공포로 다가왔다.
독립할 나이가 한참 넘었는데 부모님 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님의 기대를 듬뿍 받는 장남이었다.
사회인으로서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성실히 일하면 합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믿음으로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직장인의 역할에 충실한 적도 있었다.
그는 마른 유리처럼 뻑뻑한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빈곤하고 초라해서 여자가 떠났다고 생각했다. 무기력증으로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다는 현실 앞에서 자존감도 크게 훼손됐다.
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직장을 뛰쳐나온 것은 알게 모르게 그에게 가해지는 편견과 차별에 의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몇 차례 계속되면서 이제 그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독특하고 남다른 인식과 행동에 기인했다.
그는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있으면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말은 엉뚱하게 나오고 분위기는 지루하게 흘러갔다. 누구처럼 재미있고 재치 있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어디서든 인기가 없었다. 인기는 고사하고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들이 하는 담배도 술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회식자리도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하는 일도 단조롭고 주어진 일도 매우 느리게 처리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를 답답하고 고루하게 여겼고, 필요한 말 외에 사적으로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밥도 혼자 먹었고, 차도 혼자 마셨다.
어느 날 친구가 소개해준 여자를 만났다.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책에서 읽었던 파란 숲 이야기를 했다.
“파란색을 너무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어요. 파란색을 너무 좋아해 파란 말을 타고 다니는 파란 기사가 됐어요. 청기사가 된 그는 이 세상 숲에다 파란 말들을 풀어놓았어요. 파란 말들은 파란 망아지를 낳았어요. 숲은 금세 파란 숲으로 변했어요.”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런 숲에 가보고 싶은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 몹시 두려웠다.
그가 용기를 내어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란 숲에 꼭 데려가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행복했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겠다고 그녀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동안 그를 따라다니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를 만나 공원 벤치에서 비둘기나 나무나 꽃을 보며 시간을 보냈던 일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시장을 다니며 떡볶이나 라면을 먹는 일도 이제 지쳤다고 했다.
그가 산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런 곳이 있는지 궁금했고 절실했다.
그는 꽃들의 봄을, 환한 매화꽃, 새들의 푸르릉 거리는 날갯짓과 나비의 숨바꼭질을 생각했다. 까마득히 잊었던 날들이 기억났다.
어릴 적 친구들과 맘껏 누비던 고향의 산과 숲이었다. 연을 날리고 나비를 쫓던 순수했던 시간들, 숲 속에 찔레꽃 냄새가 그득했던 파란 숲을 생각했다.
그는 씩씩대는 소리마저 묻힌 검고 깊고 고요한 숲에서 한 마리의 파란 말이 돼 잃어버린 숲을 향해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