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초입 길로 들어섰다. '무단경작 금지'란 팻말이 무색하게 넓적한 호박잎들이 큰 손을 펼쳐 꽃들을 받들고 있었다. 꽃들은 수확의 기쁨을 누리려는 누군가의 미소처럼 노랗게 퍼져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목덜미에 내려앉았지만 그 무엇으로도 뿌리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견딜 만했다. 무더운 습기가 사라진 산에선 이미 가을 냄새가 났다
얼마 전부터 숲길을 걷거나 산속을 헤매거나 호젓한 공원 벤치에 앉아 무심히 하늘을 보고 있으면 쓸쓸한 바람에 실려오는 가을 냄새가 코끝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저녁놀 그늘진 풀숲으로 사라지면 풀벌레소리가 더 요란해졌다.
물기를 잃어가는 나무에도, 사소한 바람에도 힘없이 살랑대는 이파리에도, 애잔한 산새 울음에도, 부스스한 머리칼이 날릴 때도 가을 냄새가 났다. 건조하고 메마르면서도 청량한 박하 같은,
가을비가 내렸다. 우수에 찬 눈빛처럼 촉촉한 가을비가 적요의 벌판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푸름을 잃고 퇴색한 빛깔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슬픔처럼 서늘한 차창에 이마를 대고 지나가는 산과 들판을 바라본다. 공허의 벌판이 곧 결실로 채워질 날들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응시했다.
가을 냄새는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느껴지는 것, 뼛속 깊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가을한테는 산고의 아픔을 묵묵히 견뎌내고, 다가올 역경에 대비하는 강인한 어머니 냄새가 난다. 결핍 속에 풍요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갈 때를 알고 떠나는 모든 생명을 축복해 주는 숭고하고 향긋한 냄새.
가을이 깊어질수록 냄새도 짙어진다. 늘 그랬듯이, 산과 들, 어디서든 머리를 뒤로 젖히고 마음을 한껏 열어 취하도록 가을 냄새를 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