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리셔스테이블에 갔다가 김수빈 작가님의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내가 무슨 색인 지는 알고 있어."라는 책을 샀다. 부스가 너무 예뻐서 홀린 듯이 다가갔다가, 책도 사고 작품에 가까운 수제공책도 샀다. 솔직하고 통통 튀는 작가님은 독자들도 책의 일부분이 되길 원하셨던 것 같다. 책 중간중간 질문들이 있고, 그에 맞춰 답을 할 수 있게 빈칸으로 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 글은 "그날의 나에게 하는 혼잣말"이라는 질문 모음을 시작으로 쓰는 글이다 :D
직접 색칠하신 노트...
글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
그날의 나에게 하는 혼잣말
Q. 언제의 나에게?
A. 2016년 말 세상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 인생에서 가장 추웠단 그날 밤의 나에게
Q. 그날의 나는 어때?
A. 엉망진창, 다 부서졌는데도 부서질게 남아있는 것처럼 계속 부서지던 날이야.
Q. 그날의 나에게 못다 한 말. 해주고 싶은 말
A. 마음껏 슬퍼해도 돼, 이 슬픔에서 도망칠 구석이 없어. 이 슬픔은 다 표현할 때까지 사라지지도 않고 계속 남아있어. 오래 걸릴 거야, 그만큼 사랑했으니깐. 그러니깐 숨기지 말고 다 표현해야 해. 아프다고 울부짖고 울어야 해 많이 많이.
그러나 하나 약속할 수 있어. 이 슬픔에도 끝은 있어. 행복이 온다기보다는,더 이상 그로 인해슬프지 않을 날이 오긴 올 거야. 그리고 너는 훨씬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A. 슬퍼, 그렇지만 또 기뻐. 고생했던 내가 안쓰러워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지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날의 이야기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연인과 헤어진 날의 나에게 하는 혼잣말이다.
군대를 기다리고, 짧은 이민 생활도 기다리고, 대학원 생활을 버텨내며 어렵고 어렵게 이어지고 끊기지 않은 채로 질기게도 이어져왔던 인연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이어져왔기에 헤어지는 것도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쉽게 끝나기도 했다. 조금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다정한 사람이라 그랬나, 헤어져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평소처럼 나를 안아주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라고 했었나, '이런 결정을 해서 미안해'라고 했었나. 어떠한 용서를 구하는 마지막말과 함께였다. '응'이라고 대답했나 고개를 끄덕였나, 그냥 그 품에서 나왔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각자의 갈 길을 가기 시작한 뒤 돌아보지 않았다. 뒤 돌면 쫓아갈 것 같았으니깐, 다시 한번 붙잡을 것 같았으니깐.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마지막 모습은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두고 갔을지는 본 것처럼 생생하게 안다. 분명, 뛰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빨리 보고 싶다고 뛰어오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 돌아가는 길도 뛰어서 가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서도 도망치듯 그렇게 뛰어갔을 것이다.
이별할 걸 알고 만난 날이었다. 그래서 공책 하나를 들고나갔었다. 그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쓰기 시작했던 우리의 일을 담은 일기장 같은 거였다. 6년을 지내면서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적었던 공책이다. 분명한 독자가 있는 편지글들이 들어있는 공책이었다. 나중에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에 한 번도 쓰고 있다고 알려준 적도 없는 공책이었다.
공책의 앞부분에는 시와 그림, 사랑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고, 뒤로 갈수록 좀 뜨문뜨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늘 사랑이 적혀 있었다. '네가 밉다'라고 했다가도 결론적으론 사랑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들을 담은 공책을 헤어지더라도 그에게 주고 싶어서, 헤어지는 날 가방에 챙겨 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읽지 않을 것 같았고, 읽더라도 변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결국 이 공책도 버려질 텐데, 내 마음처럼 사라지고 말 텐데. 나도 더 이상 그 공책은 갖고 있고 싶지 않아서, 들고나갔던 공책을 가방에서 꺼내 아파트 뒤쪽에 있는 종이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우리의 추억을, 6년을, 내가 한 사랑의 말들과 그가 해준 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빼곡히 써 내려간 그 시간들을 그곳에 버렸다.
공책은 버릴 수라도 있지, 마음에 남은 추억과 사랑 미련은 쉽게 버려지지 않아서 그 이후로 한 동안, 생각보다 오랜 시간 힘들었다. 끝나지 않는 아픔과 슬픔에 스스로도 당황스러워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 그에 대해, 그와의 이별에 대해, 나의 힘듦에 대해 감정의 동요 없이 말하기가 어려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나 얘기할 수 있었다.
작년에 상담을 받을 때, 한참을 잊고 있었던, 그와의 이별 얘기를 오랜만에 꺼냈는데 자꾸만 울컥했다. 선생님은 "벌써 6년 전의 일인데, 어제 일처럼생생한 감정이 느껴져요"하며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진짜 최종붕괴. 진절머리가 나버렸다. '뭐가 이렇게 미련해갖고 아직까지도 울고 있는 걸까?' 내가 싫고, 지독하게도 떠나 지지 않는 그 사람이 너무 미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이 두렵기도 했다. '너는 진짜 내 인생을 망치는구나. 제발 놔줘. 꺼져 진짜.' 마음속 유령에게 빌었다.
이제는 그냥 나라는 사람이 그러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렇게까지 깊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의미를 부여해서 잊는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좀 스스로를 지켜야지 하는 다짐이나 하면서 말이다.
어딘가에 공개되는 글로, 그와의 이별에 대해 쓰는데도 7년이 걸렸다. 그래도 이렇게 글로 쓰고 있는 지금은 이제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니깐. 그것 자체로도 고무적이다. 나는 7년 전의 내가 아니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조금 낡고 지치고 해져서 빛이 바랜 느낌이지만, 옹이 나고 못생겨도 윤이 나게 닦아낸 빈티지 가구처럼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니깐, 멋진 사람이 되기까지 견뎌낸 스스로를 칭찬한다. 앞으로의 어려움도, 이런 식으로 느리고 미련할 수 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성장하며 이겨낼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