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문득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때는 역대 최고기온을 갱신하고 있던 2018년 7월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나의 서른 살 생일이 갓 지난 주말 오후였다. 여유가 나면 쾌적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며 책을 읽곤 했는데, 그날따라 책에 몰입이 안되어 문득 책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카페 밖 가로수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유리창을 미끄럼 타고 내려와 송송 땀방울을 흘리는, 반쯤 비워진 유리잔에 비추어 찬란히 산란되었다.
나는 휴대폰을 얼른 들어 이 순간을 포착하려고 애썼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대는 카페 진상 고객이 된 것은 덤이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유리잔과 만나 찬란히 부서지는 햇살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벅찬 감정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글쓰기밖에 없다는 것을. 아무리 비싸고 좋은 카메라도 사진에 감정을 담을 수는 없다. 추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당시 그 순간에 연관된 행복한 감정과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글, 그림, 음악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을 담을 수 있다. 나는 곰손이었기에 미술은 시도해보지도 않았고, 바이올린을 오랫동안 배우다가 3년째 제자리걸음인 실력에 레슨 해주시던 선생님이 두 손 들었던 기억이 있다. 따라서 내가 내면에서 배어 나오는 무형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글 뿐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글을 쓸 수 있을까?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항상 영문학을 전공한 친누나가 쓴 글을 읽고 풍부한 표현력, 정확한 단어 선택과 예리한 텍스트 분석에 경탄하곤 했다. 나는 아름답고 훌륭한 문장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런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황홀함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글쓰기는 가만히 놔두면 퇴화되어 지방으로 변하는 근육과 같아서, 매일매일 꾸준히 조금씩 사용하여야 발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따라서 내 글쓰기 근육이 지금보다 더 퇴화되기 전, 조금이나마 키우고 싶다.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서 삶의 길 위에서 항상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라고. 서른의 문턱에서 감히 나에게 답한다. 그렇다. 글쓰기에 내 마음이 담겨 있다. 지금부터라도 더 늦기 전에 글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