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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Mar 12. 2017

나홀로 도쿄 여행 - Day 3

오다와라

온천이 있는 곳에서는 샤워실을 쓰지 않게 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침 저녁으로 차라리 온천을 하고 그 김에 씻는 것이 백배 편하다. 일본에서 온천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메인 테마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베이스라고나 할까.

이 곳은 조식이 기본 제공이다. 3만원에 조식까지 나온다니 여기가 일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혜자스럽다. 아침 온천, 아침 식사가 모두 7시에서 9시까지라고 했지, 아마? 지금이 7시반, 여유롭게 다니려면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한다. 오늘 목표는 점심을 하코네에서 먹는거다.

잘때 복장 그대로 온천으로 간다. 어제는 기분 내려고 유카타를 입었지만 그렇게 뭔가 관습을 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 스타일이 아니다. 온천에 들어서니 사람이 두명 정도 있다. 옷을 갈아입는데 문득 떠오른다. 아 나 속옷 한번도 안 갈아입었구나. 이럴거면 왜 가져왔지. 오늘 하루는 좀 깨끗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 아닌 다짐을 해본다.


온천에 들어가니 이제 익숙해진 얼굴들이 보인다. 티비투덜남과 한국어잘하는남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제 자주 보이던 작은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젊은 아빠도 보인다. 단 하루 있었을 뿐인데 벌써 다 익숙한 사람들이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도 잠시 온천에 몸을 녹인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그에 반해 따뜻하게 몸을 녹여주는 물의 기운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이런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축복이다.


내친 김에 1층 리셉션으로 가서 면도기도 하나 받아온다. 이곳은 면도기, 칫솔을 무료로 제공한다. 숙소로 가기 전에 면도도 오랜만에 하고 정리를 해본다. 오늘은 좀 깔끔하게 지내보자, 경훈아!

2층으로 오니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다. 그냥 뷔페식으로 알아서 퍼 먹는 것이 아니라 계란과 소세지를 직접 구워주고 있다. 여기는 그런데 외국인 스탭이 상당히 많다. 아마도 여행 다니다가 잠시 정착한 사람들이겠지? 우리나라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탭을 하려면 숙식 제공인 대신에 월급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도 비슷한 시스템인지 궁금하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침을 먹는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운이 좋을 예정 같다. 어제보다 더 좋아진 날씨에 환해진 바다가 창문 너머에서 나를 반겨준다. 여행에서의 또 다른 묘미는 이런 풍경을 보면서 저렴한 드립 커피 한잔과 함께 하는 아침 식사다.

한국말을 잘하는 아저씨가 와서 오늘은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하코네를 갈거라고 하니 여행 책자를 열고 이것 저것 가르쳐준다.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을 본 서양인 스탭이 오더니 자기도 한국말로 말을 건다. 둘다 한국말을 꽤나 한다. 내 일어 보다는 백배 낫다. 한국 사람 한명 없는 이곳에서 외국인 두명과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곳은 한국인이 거의 안온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의 특징이 유명한 곳만 찾는다. 어렵게 낸 휴가에 모험을 안기 힘든 것도 있지만 스스로 개척하기 보다는 개척된 길을 쫓아가는 것이 익숙한 것도 한 원인일거다. 라오스 여행 중에도 유명한 방비엥에서는 정말 수없이 많은 한국인을 만났지만, 그보다 조금 더 위인 므앙응오이느와에서는 그 많던 한국인이 싹 사라졌었다. 좀 안타까운 부분이다. 남의 여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식사를 마치고 내 그릇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마무리한다. 이제 슬슬 이동을 할때이다. 하코네까지는 어차피 가까우니 천천히 느긋하게 한번 길을 떠나봐야겠다. 아타미, 정말 쌩뚱맞게 온 곳이지만 나름 좋은 추억이 생긴 곳 같다. 그래서 생긴 추억이 뭐냐, 라고 물어보면 사실 딱히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다음에 여자친구 생기면 같이 한번 더 와볼까나.

아타미 역으로 가는 길은 일부러 처음에 올라 왔던 해변길로 가본다. 시간도 넉넉하고 날도 좋아서 바다를 보면서 천천히 가고 싶다. 여기 해변도 있다고 들었는데, 한 여름에 바다수영도 하고 온천도 하러 오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여기도 성수기가 되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려나.


전철역 부근은 예상외로 사람들이 많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라 그런거 아닌가 싶다. 어제는 가게의 반 이상이 닫혀 있던 유령도시 같았는데 오늘은 활기찬 것이 나름 관광도시의 분위기를 풍긴다. 자, 그럼 쇼핑을 한번 시작해볼까?

내가 사는 것은 딱 하나다. 작년 부터 여행 다닐때 그 지방의 이름이 새겨진 자석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다닌 수많은 나라들은 수집하지 않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기념품을 하나 정도는 모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사실 집착인데…


지하철 근처 쇼핑몰을 들어서니 한국 남자 아이돌의 노래가 들려온다. 내가 여자 아이돌은 신곡까지 다 꾀차고 있지만 남자 아이돌 노래는 한번도 안들어봐서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다. 가사가 '우린 젊기에…' 뭐시기 나오는데 무슨 노래일까? 요즘 핫하다는 방탄청년단인가 하는 걔네들일려나. 얼굴도 모른다. 참고로 나는 아이유와 아이오아이 팬! 물론 대세 트와이스도 좋고… 여자친구도 좋고… 요즘은 AOA도 괜찮고..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

확실히 아타미는 주요 관광지가 아닌듯 싶다. 한 이삼십분 둘러보지만 아타미를 주제로 한 자석은 안보인다. 도쿄에 대한 자석이거나 고양이 자석만 수두룩하다. 에잇, 내가 언제부터 이런거 모았다고. 그냥 패스하자.

기차표를 사러가기 전에 지도를 열고 내가 가려는 지역의 한문 이름부터 외워둔다. 헤매는 짓도 한두번이지 이제 이틀 지났으니 요령이 생겼다. 내가 가려는 오다하라는 한문으로 '소전원', 작은 밭의 근원이라는 이름이다. 노선도를 보니 410엔, 생각보다 저렴한 것이 딱 좋다. 익숙하게 표를 사고 주황색 라인을 찾아가본다.

근데 이게 상행, 하행이 있네? 어떤거지…? 이 선이 게다가 도쿄까지 이어지나보다. 고민하다 일단 한쪽을 올라가본다. 이미 기차가 하나 와 있는데 이걸 타도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다. 역무원도 안보여서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때 기차를 모는 기사님이 보이길래 다가서니 살짝 창문을 열어주신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이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물어본다.

반대편으로 가서 잠시 앉아 있으니 기차가 와서 올라탄다. 그런데 기차도 뭔 그린카가 있고 복잡하다. 에라 모르겠다. 뭐 방향은 맞으니 가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기겠지. 일단 올라탄다. 그린카는 두 칸 정도 별도로 있는데 딱 보기에 비싼 곳 같아서 허접한 칸을 찾아서 들어가 앉는다. 일본은 진짜 이 기차, 지하철 시스템 개편이 시급하다. 일본인들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건가? 일본어는 한문을 읽지 못하면 정말 무의하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확실하게 깨닫는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다시 책을 편다. 페이팔 창업자인 이 저자는 원래 스탠포드 법대를 나와서 대법관의 문턱까지 갔다가 탈락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치 창출을 하는 비즈니스의 길로 들어섰기에 탈락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얘기를 한다. 일종의 세옹지마의 얘기다.


난 좀 다르게 생각한다. 나도 사업을 과연 계속 했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하기도 하고, 오히려 지금이 더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망한게 잘되었다가 아니라 그러하기에 또 다른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갔으면 내가 지금과는 다른 더 힘들기만 한 인생에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선택의 길로 갔으면 또 그 안에서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나를 발견했을 것이고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았을거라 확신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다. 과거에 어떤 선택을 했던간에 그 결과로 현재의 내가 있으면 지금을 즐기고 지금의 선택에 집중하면 된다. 후회는 무의미하다. 걱정도 무의미하다. 그저 지금의 나를 인지하고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했던 오다와라 역에 도착한다. 생각보다 가깝다. 내려서 보니 여기는 아타미 보다도 훨씬 번화가이다. 자, 이제 하코네를 제대로 즐겨볼까?

그런데 여기 하코네 맞나…? 내려서 큰길로 나서니 왠지 여기도 아닌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거 도데체 하코네의 실체는 뭐지. 또 이상한 곳으로 온건가. 일단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본다. 가는 길에 보이는 동네의 모습은 마음에 든다. 일단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많아 보여서 살짝 기대가 된다.

이번 게스트하우스는 이전에 묵었던 곳과 정반대의 느낌이다. 전에는 현대식이었다면 여기는 굉장히 전통식이며 규모도 자그마하다. 6개 침대가 있는 도미토리가 유일하다. 그래도 왠지 정감있어 보여서 마음데 든다. 휴게실에서 자고 있는 냥이가 특히나 좋다. 왠지 우리 현미가 좀 늙으면 이 녀석처럼 될 것 같다. 아 우리 애들은 잘 있겠지…?

때마침 사촌동생한테서 연락이 온다. 오늘 우리집에 가서 애들 한번 보살펴 주고 밥도 채워놓겠단다. 어차피 내일까지 비울걸 생각해서 다 준비해놓기는 했지만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기특하다. 나한테는 친한 여자 사촌 동생이 둘 있다. 하나는 친가고, 하나는 외가인데 정말 둘이 극과 극이다. 친가는 서울에서 살았고, 외가는 창원에서 자랐는데 그 차이라고 하기에는 동갑임에도 둘이 극과 극이다. 둘다 이 글을 읽을테니 뭐가 다른지는 얘기하지 않기로.

하코네에서 목표는 일단 하나다. 일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하코네에 오면 삶은 계란을 꼭 먹어야 한다고 모두 강조한다. 이걸 먹으면 수명이 8년 늘어난다나? 뭐 당연히 믿는건 아니지만 잼있을듯 해보여 찾아볼 생각이다. 스탭에게 물어보니 버스 타고 15분 정도 가면 그곳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 값이 1000엔이라는 소리를 한다. 15분 가는데 1만원이라니… 일본의 교통비는 정말 상상초월이다.


일단 떠나기에 앞서서 게스트하우스에 친숙해지도록 거실에 앉아서 잠시 글을 정리한다. 저 냥이는 나이가 좀 있는지 하루종일 계속 잠만 잔다. 아, 쟤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우리 애들이 미친듯이 보고 싶어진다. 내일되면 보러 가니 너무 걱정말자. 그나저나 여기도 숙박객은 나 혼자인듯 하다. 이거 참… 내가 손님을 몰아내나?


슬슬 출발하려고 하는데 서양남자 2명이서 들어선다. 딱 보기에 여행자 같다. 이런 친구들은 친해지기 쉽다. 침대를 배정 받고 인사를 나누니 역시나 같이 가고 싶다고 한다. 장기 여행 다닐때는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다니기 싫었는데, 이번 여행은 고독을 즐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온 것이 아니기에 흔쾌히 승락한다.


매튜와 조, 독일인이고 친구사이라고 한다. 시드니에서 오는 길이라는데 여행을 길게 한 친구들은 아니다. 여행을 길게 한 친구들은 확실히 얘기해보면 차이가 난다. 좀 더 열려 있고, 자기만의 묘한 분위기가 있어서 얘기하면 즐거워진다. 이 친구들은 딱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연애할 것도 아닌데 오늘 하루 친해져 보기로 한다. 일본어도 못 한다니 오늘 내가 좀 도아주지 뭐. 훗.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에게 들어보니 오늘의 코스가 대충 나온다. 일단 버스를 타고 오와쿠다니라는 곳에 가서 계란을 먹고 점심을 떼운다. 그 이후 케이블카 같은 것을 타고 바다쪽으로 간 후,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간다. 그쪽에서 버스를 타고 하코네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텐잔 온천을 간다. 그리고 동네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다. 꽤 괜찮은 코스다.


버스를 타러 가는데, 이 친구들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 길을 막 건넌다. 아서라, 나도 일본에 익숙해진건지 그런 모습을 보니 허걱스럽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얘기를 잠시 나눠보니 일본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대동소이하다. 확실히 내 가치관의 기본 개념은 서양식이지 싶다. 가끔은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 얘기가 잘 통할때가 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고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


서양인들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갑자기 사람들이 와서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일본인들의 서양인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저번에 왔을때 스위스 남자애랑 친해져서 술을 먹는데 옆에 일본 아저씨들이 10만원어치 술을 사준적도 있다. 서양애들끼리만 있으면 위화감이 들지만 내가 그걸 중화시키니 더 접근이 쉬운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가. 하긴 다름에 대한 호기심은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 다름에 등급을 부여한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버스에 올라타고 자리를 잡는다. 일행이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해지기에 이렇게 이동할때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자꾸 이것저것 말을 건다. 여행 오래 다닌 애들하고 다니면 이럴때 알아서 대해줘서 편한데… 조용함을 어색함으로 해석하지 않고 즐기는 사람은 동행해도 나쁘지 않다.


버스가 한 이십분 가니 관광지스러운 곳이 나타난다. 아, 이곳이 진짜 하코네인가보다. 조와 메튜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왜 자꾸 이상한 곳에 도착하는지 알겠다. 여기는 유후인 처럼 료칸 같은 비싼 숙소만 있는데 내가 숙소를 최저가로 3만원 수준에서 찾으니 자꾸 근처의 다른 곳이 나오게 된거다. 뭐 잠시 지나가면서 눈에 담았으면 됐다. 여기는 유후인 같이 비싼 동네인가보다. 나중에 온천하러 오는 곳이 이곳이려나? 그렇다면 그때 자세히 보지 뭐.

버스가 산을 한참 오르더니 갑자기 모두 내린다. 아직 다 오지 않은 것 같은데… 기사님이 뭐라 뭐라 하시는데 내 짧은 일어로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오와쿠다니 얘기를 자꾸 하시는걸 보니 우리와도 확실히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괜히 고민하느니 앞에 가서 기사님한테 여쭤보니 여기서 내리고 앞의 차로 갈아타라는 얘기 같다. 대신 갈아탄 버스는 무료라고 한다.


1100엔을 내고 버스를 갈아탄다. 이제 산정상에 가까워진건지 슬슬 산의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밖에는 눈이 살짝 내리고 있다. 뭔가 약간 비현실적인 묘한 분위기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온천에 '지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상 가까이에 이르니 차들이 줄을 서 있다. 아마도 주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버스에 올라타고 있는지라 크게 기다리지 않고 들어간다. 바깥은 그새 눈이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여기만 오는건지 아래에도 이렇게 쏟아지는건지 궁금해진다.

내리니 눈이 너무 심하게 내려서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볼건 봐야지. 뛰듯이 전망대로 가서 이곳의 그 유명한 분화구를 관람한다. 흠… 내가 이걸 보려고 이 먼길을 왔단 말인가. 한시간 넘게 걸려서 오기에는 너무 아쉬운 풍경이다. 관광지가 다 이렇지 뭐. 어차피 뭔가를 보기 보다는 검은달걀을 먹으러 온거 아니냐며 혼자 위안을 삼아본다. 매튜와 조도 다소 실망한듯 싶지만 내색은 안한다. 누군가와 같이 다니게 되면 상대방 눈치를 보느라 감정도 제대로 표출하기 힘들다. 오랜만에 동행이 생기니 영 불편하다.

벌써 2시가 넘었다. 일단 굶주린 배를 해결하고자 라면을 먹으러 간다. 이곳은 검은달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검은색이다. 라면도 검은색 면을 쓰고 있다. 마케팅적인 컨셉으로 보이지만 꽤나 똑똑하게 컨셉을 잡았다. 라면도 800엔으로 관광지인걸 감안하면 괜찮은 가격이다. 확실히 일본에서 바가지는 만나기 힘들다. 모두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공산주위와 사회주의가 가장 어울리는 곳이 일본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라면을 먹고 나는 잠시 자석 기념품을 찾으러 가고 이 친구들은 담배를 피고 온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석을 찾고 말리라! 기념품 샵을 뒤져보는데 확실히 이곳은 관광지라 그런지 자석이 하나 보인다. 완전 딱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가 어디냐. 400엔 정도를 들여서 하나를 산다.


그런데 이 친구들 안보인다. 담배를 피러 간 곳에도 없고 주변을 둘러봐도 없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사람도 많은데 이거 찾을 수 있을까? 좀 찾아보다 달걀을 사러 가버린다. 인연이면 만나겠지. 어차피 헤어져도 숙소로 가면 다시 만날거다. 그리고 사실 혼자 다니는게 편하다 생각하고 있었어서 잘됐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줄을 서서 검은 달걀을 5천원을 주고 산다. 안에는 달걀이 5개 들어있다. 달걀 하나에 천원인 셈인데, 물론 비싸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이걸 안 살수는 없지. 달걀을 사고 기념품샵을 돌아다니니 아까 자석보다 훨씬 귀여운 자석을 발견한다. 그래 이놈이지! 아, 아까 왜 샀을까. 어쩔 수 없지. 하나 더 산다. 이 집착도 그만 거둬야 하는데…

자 이제 달걀을 먹어볼까? 확실히 달걀의 검은색이 페인트로 칠한 부활절 달걀과는 다른 느낌이다. 한쪽 편은 아예 달걀을 먹기 좋게 쓰레기통과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그 사람들과 어울려서 달걀을 까서 먹어본다. 이게 수명을 7년 늘려준다는거지? 그래, 이제 나는 107살까지 살게 되겠군.

이때 누가 뒤에서 아는 척을 한다. 돌아보니 눈을 온몸에 뒤집어 쓴 매튜가 쳐다보고 있다. 이놈들 나 찾으러 좀 돌아다닌건가? 혼자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만나니 다행이다. 담배 피다 아차 싶어서 돌아와보니 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다시 만난 것을 보니 인연은 있나보다.

이곳에 와보니 관광지의 느낌이 완연하다. 올라올때는 버스를 타고 오고, 내려갈때는 케이블카, 케이블카가 끝나는 곳에는 페리로 강을 건너는 일련의 코스가 정해져 있다. 케이블카는 4시가 막차라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서 표를 사고 줄을 선다. 이 표도 1000엔이다. 그냥 움직이면 모든 것이 1000엔이다.

눈이 와서인지 케이블카에서 보이는 전경이 예상외로 아름답다. 날씨만 좋으면 여기서 후지산까지 보인다는데 오늘은 그런 복은 없다. 그래도 나름 눈이 덮힌 모습도 충분히 아름다워서 만족스럽다.

올라올때는 한참이었지만 내려올때는 직행이라 그런지 순식간이다. 시간이 이제 꽤나 늦어서 계획했던 온천을 가려면 서두를 필요가 있다. 바로 페리를 타는 곳으로 가서 시간표를 보니 떠나는 시간이 30분 후다. 게다가 이것도 1000엔이다. 어쩌지? 너무 늦어지기도 하고 과연 페리를 타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찾아보니 버스도 보인다. 버스는 하코네역까지 가고 얘도 1050엔이라고 한다. 가려는 온천이 그쪽이니 그게 낫겠다. 줄이 길지만, 뭐 언젠가는 줄어들거고 배타는 것보다 시간은 단축되지 싶다. 그나저나 이 친구들 나한테 맡기고 다 알아보게 하네. 어차피 이리 될줄 알았다. 이상하게 나랑 일행이 되면 보통  알아볼 생각을 안한다.


버스를 타고 낑겨서 간다. 일본인이 체구가 작아서인지 일본의 버스는 나에게도 비좁다. 서양애들한테는 정말 불편할 것이다. 사람이 많아서 서서 가는 사람도 있으니 그래도 앉은 것 자체로 만족해야지.


일본 사람의 서양인에 대한 관심은 많이 경험해봤다. 지금도 서 있던 한 일본 여성분이 뒤에 앉은 메튜 일행에게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한다. 나 혼자 다닐때는 정말 아무도 눈꼽만큼도 관심을 안주더니… 얘네가 잘 생긴 것도 아니다. 내가 나은거 같은데. 정말이다! 아님 말고…

오늘은 이 친구들과 한잔 하게 될 예정이다. 내가 말을 잘못 꺼내는 바람에 술배틀을 붙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차라리 숙소에 다른 사람 있으면 같이 끼워서 술 올림픽을 한번 열어볼까. 어차피 내일은 떠나는 날이니 오늘은 좀 달려도 큰 무리 없지 싶다. 그래 오늘은 한번 마음껏 달려보자꾸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온천을 물어보니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텐잔온천이라고 했었다. 이 두 친구는 온천 경험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처음은 항상 의미가 있는 법이다. 가능하면 최고의 온천을 맞이하게 하고 싶어서 시간이 좀 늦더라도 텐잔온천으로 가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일단 하코네역에서 내려서 이리 저리 물어보지만 일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이 생각보다 틀린 경우가 많다. 내가 일어를 잘못 얘기했거나 대답하는 일본어를 잘못 들었거나, 이유는 잘 모르겠다. 결국 애들과 함께 일본에서의 첫번째 택시를 경험한다.

일본 택시는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그리고 기사님들은 항상 양복을 입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대단하고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여기서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청소하시는 분들부터, 택시 기사, 버스 기사, 모두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이걸 다른 용어로 오타쿠 문화라고 할 수 있지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택시 기사들 보고 양복 입고 일하라고 강요해도 안될 것이 여기서는 법적인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자발적으로 입는 느낌이다. 이건 꼭 옷의 문제가 아니라 길거리, 집안 어디서든 느껴진다.


어찌 보면 일종의 강박관념 같이 보일때도 있다. 시스템을 중시하며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인상이다. 강둑이나 산 같은 자연에서도 어떻게든 정돈을 하려고 하는 의도가 보이고는 한다. 줄이 딱딱 맞춰 세워져 있는 임시 간판을 보면 심지어 가끔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에 오기 전에는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가 비슷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이 두 나라만큼 다른 나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텐잔 온천까지 택시비는 910엔이 나와서 내가 310엔을 낸다. 자, 서양인 친구들과의 첫번째 온천 경험을 해볼까?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친구들과 같이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최소한의 얇은 옷은 남겨놓고 싶다. 모두 다 벗으면 알게 되는 사실 혹은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나 할까.

이 온천 엄청 고급스럽다. 사실 하코네라는 동네 자체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그 고급스러운 하코네에서도 이곳은 더 럭셔리해보인다. 표는 1030엔, 버스고 기차고 온천이고 모두 비슷하다. 일본답게 표를 자판기로 뽑게 되어 있는데 밑에 보니 하코네 프리패스를 가지고 있을 경우 10엔이지만 할인도 된다. 하코네 프리패스가 5000엔이라고 했던가? 오늘 쓴 교통비 등등을 감안하면 단 하루 있더라고 프리패스를 사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찜질방 같이 되어 있는 대기실을 지나 지하로 들어가니 바로 외부의 온천이 나타난다. 탈의실과 온천이 바로 붙어 있고 둘을 분리하는 벽이 없어서 바로 외부로 노출되는 형태다. 나체의 일본 남자들이 이 시간에도 꽤나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국적이라고 할까, 특이하다고나 할까.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지만 나쁘지 않다. 외부로 노출된 탈의실이기에 찬 바람이 계속 들어와서 좀 쌀쌀하지만 서양 친구들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배려를 하며 먼저 옷을 벗고 온천으로 들어선다.


일단 간단히 옷을 씻고 노천탕에 몸을 담가본다. 조명은 어둡고 달빛은 은은하게 비추며 탕은 모두 검은색 돌로 만들어져서 음의 기운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온천의 수온으로 인한 수증기 사이로 비치는 달빛의 간지러움이 온몸에 느껴진다.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의 활기가 주변의 분위기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사무라이가 한명 튀어나올 것은 '왜색'이 짙게 느껴지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살면서 느끼는 가장 일본스러운 분위기일 것이다. 역시 마지막 옷을 벗고 마주해서 그런걸까.


탕에 앉아서 매트, 그리고 조와 얘기를 나눠본다. 사실 서양에도 누드비치가 많아서 이 친구들도 이런 나체의 활동이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다고 한다. 누드비치라… 살면서 꽤 많은 것을 경험해봤지만 누드비치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다음 여행지는 유럽으로 한번 잡아볼까?


수증기 사이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야외인데 2층도 있는건가? 호기심 많은 조가 먼저 올라가보고 나도 미끄리지지 않게 조심하며 올라가본다. 계단 사이 사이에 탕을 만들어놔서 또 나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일본인들과 조 사이에 자리를 잡고 다시 한번 몸을 녹여본다.


온천은 시간 제한이 없지만 나는 한시간 이상은 아무래도 버겁다. 몸에 열이 많은건지 에너지가 많은 건지 뜨거운 것은 나랑 잘 안어울린다. 어릴때 한의사에게 그리 듣기도 했고, 실제로도 한 겨울에도 나는 얼음물만 마신다. 연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행동에도 항상 속에 어떤 분출되지 못하는 에너지가 있다고 느껴진다. 여기서 각성하면 초사아이언이라도 되는거일려나? 일본에 왔으니 이런 헛소리도 한번쯤은 해봐야지.


한 한시간이 지나니 나는 슬슬 가고 싶은데 이 친구들은 갈 생각이 없다. 지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온천 첫 경험이라는 이 친구들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고, 대기실에 먼저 가서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면서 기다리고 있을까 싶다. 더 있다가는 왠지 고협압으로 쓰러질것 같다.


한쪽편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여전히 온천을 즐기고 있는 조를 찾아서 먼저 올라가 있을테니 내 걱정은 말고 천천히 즐기다 오라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나는 머리만 감고 몸은 가볍게 행구고 탕을 나간다. 어디선가 듣기로 온천을 제대로 몸에 담으려면 나올때 비눗칠로 몸을 닦지 말고 그냥 흐르는 물에 씻기만 하라고 했던 것 같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조가 나오더니 곧 있어 매튜도 나온다. 아 이놈들 천천히 나오라니까. 왠지 나 때문에 나오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해진다. 그래도 1시간 반 있었으면 충분하지. 우리나라 남자들이면 1시간이면 이미 나와버렸을거다.


1층 대기실로 올라와서 보니 이 친구들 엄청 흥분해 있다. 온천이 정말 좋았나보다. 하긴 나한테도 꽤나 인상적인 이국적인 경험이었으니 아시아쪽을 처음 온다는 이 친구들한테는 엄청 강렬했겠다 싶다. 조가 자판기로 가더니 맥주를 3캔 뽑아온다. 벌써 달리자는건가? 그래 슬슬 준비운동을 해보지 뭐.

맥주를 순식간에 비우고 올라오니 벌써 8시가 넘었다. 올때는 택시를 타고 왔는데 갈때는 어떻게 가지?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큰길에서 하코네역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나저나 진짜 내가 다 알아봐주는군. 이럴 줄 알았다니까.

셔틀버스 정거장에 가서 시간표를 보니, 다음 차가 8시 45분이다. 지금이 8시15분이나 30분이나 남은 셈이다. 이거 난감한데… 온천에 가장 업된 매튜가 확 걸어가자고 한다. 거리를 보니 2키로 밖에 안되고 날도 좋아서 걸을만한 것 같다. 오키, 걸어가기로 결정!


하코네의 고급스러움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역으로 걸어가본다. 일본이 정돈에 대한 결벽증스러운 집착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강에도 깔끔하게 정리를 한 것을 보니 어떤면에서는 참 대단하다 싶다. 여기는 고급 리조트가 많아서 그런지 특히나 꼬투리를 잡을 만한 흐트러짐이 전혀 안보인다. 대단하다.


메튜 이 친구 굉장히 업됐다. 막 앞으로 뛰어가더니 돌아오고, 자판기만 보면 맥주가 있는지 확인해본다. 너 벌써 취한거니? 오늘 주림픽은 생각보다 그리 빡세진 않지 싶다. 예전 미얀마에서 프랑스 애들 둘하고 술 싸움 하다 거의 업혀간 것을 생각하고 괜히 미리 겁 먹었다. 내가 한국의 기상을 보여주지.

2키로를 천천히 30분 정도 걸려서 온다. 서로 대화도 나누고 일본의 경치를 보면서 왔더니 의외로 금방이다. 메튜는 원래 간호사였다가 지금은 의대를 진학하였고 올해 의사 자격증 시험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 의사라니, 이 친구도 예사 애가 아니었군. 조는 고졸이지만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다가 눈에 띄어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고 그 회사가 억센츄어에 인수되면서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이 친구도 예사롭지 않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 정해진 길은 없는 법인데 한국 안에서만 지내다 보면 사실 너무나도 뻔히 정해져 있는 인생의 모범답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를 정말 좋아하지만 가장 안좋은 점이 '비교'다. 남들과 비교하고 그래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 라는 생각이 자기만의 길을 가기 힘들게 한다. 고등학교 때는 남들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대학을 졸업하면 어디가서 꿀리지 않는 회사를 가기 위해서, 삼십대가 되면 결혼을 위해 연애를 해야 하고, 결혼을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하고… 이 숨막히는 구조 안에서 어떻게 창의성이 발휘되고 어떻게 자기만의 길을 갈 수가 있을까. 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소수의 한두명이 아닌 시스템적으로 자유로움을 줘야지만 이 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여행에서 만나는 애들을 보면 고졸임에도 충분히 자기 일을 즐기며 살고, 갑자기 다른 나라에서 정착하거나, 결혼도 안하고 동거만 하면 사는 친구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난다. 70살의 나이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섹스는 죽을때까지 해야지"라는 얘기를 당당히 하던 베트남에서 만난 데이브를 비롯하여 팔이 하나 잘렸어도 그 팔 잘린 것이 자기한테 가장 행운이라던 미얀마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 알봉까지,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고 다양한 길이 있다. 물론 행복이 꼭 달라야만 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택을 하려면 선택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선택지를 보고 선택한 대답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답과 같다면 그것 또한 내 길이다. 선택지를 볼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아쉬울 뿐이다.


기차를 탈까 하다가 숙소는 버스 정거장에서 더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이 나서 버스를 탄다. 일본 버스 처음에 탈때는 매우 어렵게 느껴졌는데 몇번 타다보니 시스템이 합리적이고 이해가 된다. 어느 나라든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렵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며칠만 지나면 바로 적응을 해버린다. 일본 같은 선진국이나 미얀마, 인도 같은 외진 곳이나 사실 그런 면에서는 동일하다.


숙소로 돌아오니 9시반이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어차피 온천까지 하고 왔으니 씻지 않고 짐만 푸르고 바로 길을 나선다. 오늘의 환락적인 밤은 이 게스트하우스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식당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식당에 들어서니 굉장히 잘 꾸며놓은 인테리어가 먼저 시선을 잡는다. 주인분이 이곳이 1920년에 창고로 쓰였던 곳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이런 부분이 일본에서 부러운 점이다. 우리도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지 않았으면 백년 이상된 식당, 백년 이상 된 찻집 이런 것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일본 때문이네. 쳇.

앉아서 일단 주문을 하는데, 여기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 맥주 큰 잔 하나가 800엔인 것은 좀 너무하지 않나. 안주는 싼편인데 오늘은 안주보다는 술을 먹기로 한 날이라 술이 비싸면 무의미하다. 내가 눈치를 주고 여기는 1차로 한잔만 먹고 더 싼 곳으로 이동하자고 얘기한다. 모두 격하게 동의하는 눈빛이다. 그래도 맥주는 참 맛있네.

1차는 후딱 해치우고 역 근처로 향한다. 시간이 벌써 11시인데 이곳은 하직 한창이다. 취한 사람들이 흔들흔들 거리며 걷는 것을 일본에서 보니 나름 신선하다. 늘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일본 사람들도 가끔 과음을 하고 그럴텐데 왜 번화가에도 거리에 빈대떡의 흔적이 없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나가면 신 냄새가 나는 토한 자국을 너무 쉽게 접하는지라 궁금했다. 뭐 그게 더 좋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2차는 저렴한 곳을 찾아 들어간다. 여기는 지금까지 갔던 이자카야나 이런 곳이 아닌, 우리나라로 치면 종로거리 2층에 많이 위치한 이것저것 다 파는 술집이다. 대신 술과 안주가 저렴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나쁘지 않다.

맥주를 시키고 또 얘기를 시작한다. 얘기를 하다 보니 여행에서 단골로 나오는 주제인 '행복'에 대한 주제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메튜가 물어본다. 직업이 행복에 있어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냐는 질문이다.


나는 직업을 돈만을 위해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단순 계산을 해보면, 주말을 제외하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16시간 중에서 출퇴근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야근을 안한다 하더라도 대략 10시간 정도가 일에 소요된다. 62.5%이다. 주말을 포함한다 해도 44.6%이다. 야근 등을 감안하면 직장인은 대략 자기 인생의 50%를 직장에서 보내는 셈이다. 딱 반이다.


인생의 반이 불행하면서 전체 인생을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나머지 반의 행복이 직장에서의 반의 행복을 희생하고도 상쇄할만큼 크다면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어떠한 반도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계산이다.


이걸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일과 그에 따른 연봉으로 볼 수 있다.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일은 직장에서의 반을 얘기하며 연봉은 나머지 일상에서의 반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일상에서의 반의 행복을 위하여 직장에서의 반을 너무 경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진짜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 연봉도 어느정도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선택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시선보다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금요일을 기다리는 삶은 이미 반을 버리고 가는 셈이다. 월요일을 기다리는 삶은 거꾸로 일단 반을 깔고 가는 셈이다.


그런데 이거 나름 술배틀이었는데 너무 얌전하다. 지금까지 몇병 마셨지? 맥주병으로 인당 5병 정도 마신듯 한데, 이 정도로 주림픽이라 얘기하면 안되지. 나뿐만 아니라 둘다 아직은 더 달리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이곳은 뭔가 정취가 안난다. 너무 상업적인 곳이라고나 할까.


일본식 정통 이자카야로 옮기자고 합의를 본다. 자 이제 3차를 위해 또 다시 길을 나서볼까.


우리가 하나 간과한 것이, 일본에서는 술집들이 문을 저녁에 너무 빨리 닫아 버린다. 새벽 1시인데 문을 연 곳이 없다. 이거 이러면 안되는데… 술집을 찾다 편의점이 보이면 들어가서 캔 하나씩 사들고 마시면서 또 술집을 찾아 방황한다. 서양인 두명과 한국인이 일본의 텅빈 거리에서 새벽 1시에 술집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일본에서는 12시가 지나면 그때까지 있는 단골들만 받고 문을 닫아서 자기들끼리 어울리나보다. 몇군데 시끌벅적해서 가보면 새로운 손님은 안 받는다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 거리를 2바퀴째 돌았을때 차라리 우리 숙소 근처로 가면서 술집을 찾아보기로 한다. 정 없으면 편의점에서 사가지고 가서 먹자고 합의한다.


숙소 근처 2층에서 문을 연듯한 바가 보인다. 아 저기는 열었어야 하는데… 내가 대표로 가서 살짝 메뉴를 보고 오기로 한다. 들어가니 일본 드라마에서나 보이던 고급 바인데 옷을 제대로 갖춰입은 남자 바텐더가 있고 남자 손님이 딱 한명 있다. 그런데 이 손님 뭔가 야쿠자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메뉴를 한번 보고 다음에 오겠어요 하고 내려온다. 모험도 좋지만 위험의 냄새가 나는 곳은 여행 다닐때 무조건 피하자는게 내 원칙이다.


결국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좀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뭐 그래도 생각보다 꽤나 마셔서 나쁘지는 않다. 이보다 더 마시면 과음이지 뭐. 숙소 앞에서 잠시 앉아서 한 두잔 나누다가 난 너무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자기로 한다. 술은 다 마셨으니 진거 아니다! 몸이 피곤해서일뿐. 조는 29살이고, 메튜는 33살이니 외국 나이로 쳐도 38살인 내가 체력으로 이기기에는 버거운 것이 당연한 거지 뭐.


내일은 11시쯤에 도쿄에서 지난 번에 만났던 그 친구와 아파서 못 봤던 그 친구의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래도 형인데 서울 가기 전에 밥이라도 제대로 한번 사주고 가야겠다. 그 이후에는 일본에 온다니 주변의 사람들이 사오라고 알려준 리스트나 사면서 간만에 쇼핑을 할 생각이다. 저녁 7시 비행기니 시간은 충분하다. 내일 생각은 내일 하고, 일단 오늘은 이만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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