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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10.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9

Mandalay, Myanmar to Bagan, Myanmar

중국이 조만간 패권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선진국이라 불리기는 힘들 거다. 여행 다니면서 만난 중국인 중에 배려가 있는 친구를 본 적이 없다. 

어제 도미토리에서 중국인 두 명과 같이 잤다. 10시가 넘으면 보통 도미토리에서는 무음으로 하고 조용하게 배려해줘야 하는데, 이놈들은 문자 두둥, 소리 키고 영상 보고, 얄짤 없다. 나야 안 자고 있었으니 크게 상관없었지만 독일인 한 명이 자고 있는 상황이라 한마디 하려다 그냥 말았다. 

사람을 보면 확실히 그 나라를 알게 되고 그런 게 모여서 나라의 이미지를 만든다.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과연 어떤 이미지로 보이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서도 희한하게 또 잠은 여행 후 처음으로 정말 푹 잤다. 어제 낮잠을 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어컨은 적당하였고, 코 고는 사람도 없었으며, 침대 매트리스도 얇지 않았다. 게다가 와이파이까지 안되니, 숙면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침 6시에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불구하고 서울에서 10시에 일어날 때 보다 기분이 더 상쾌하다.

오늘은 바간으로 가는 날이다. 5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지만, 빠이 갈 때 3시간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크게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바간, 과연 내 여행 역사상 가장 좋아했던 인도의 오르챠와 비슷하려나. 난 항상 오르챠의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듯하다.

6년 전, 인도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던 오르챠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일단 관광객이 너무 모일 만큼의 매력적인 유적지는 없으면서도 중간중간 이런 저런 유적지가 많아서 충분히 앤티크 한 분위기를 풍겼다. 관광객이 많이 없다 보니 사람들은 너무나도 친절하여 일주일 쯤 지나니 아이들이 "경훈아, 경훈아" 하면서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다녔다. 아침마다 좋은 일몰 포인트를 찾으러 다니던 중, 한 강아지가 인도하여 (진짜 이끌었다) 발견한 일출, 일몰 포인트는 그 이후 아침, 저녁마다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 되었었다. 다른 곳의 일출보다 월등히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출, 일몰이었다. 오르차는 또한 노여사와 만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내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줬던 곳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순진하고, 솔직한 일주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게 참 어려운 건데, 좋은 여행지의 조건은 중용이다. 너무 사람이 많아도 안되고, 너무 없어서도 안된다. 그러러면 유적지가 너무 유명해서도 안되고, 또 너무 아무것도 없어도 안된다. 지금 미얀마라는 나라 전체는 그런 느낌을 보이고 있다. 이제 이곳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고 싶다. 그곳을 찾으면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정착하여 보내는 것이 이번 여행을 가장 알차고 기억나게 보내는 방법이다.


옥상에 올라서니 여자 스태프 둘만 있고 아무도 없다. 7시부터 시작인데 6시에 올라왔으니 당연하다. 어제 모래 바람 때문에 의자 정리를 해놨지만 하나만 앞에 있길래 앉아도 되냐고 물어본 후 자리에 앉는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경전을 읽는 소리인지, 어떤 "알라라라라 알라라"라 들리는 사람이 읊어주는 소리가 저 멀리서 마이크를 타고 항상 들려온다. 근데 불교의 나라인데 왜 이슬람 같은 느낌이지.


커피나 마실까 하고 기웃 거리 는데 컵이 안 보인다. 물어보려고 보니 여자 스태프분이 의자를 내려서 배치를 하고 있다. 놀면 뭐하나. 조용히 가서 손을 거든다. 여성 스태프분, 엄청 당황하면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그래도 같이 하면 훨씬 쉽지. 괜찮다고 도와드리겠다고 하고 계속 내려서 옮겨드린다. 여자 혼자 하면 이것도 은근히 힘들겠다. 둘이 같이 하니 15분 정도에 끝낸다. 아침 운동 잘 했다.


이제 앉아서 있으니 잠시 있다 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직접 가져다 주신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서 그런가? 아까 올라온 남자가 하나 더 있어서 한번 스윽 곁눈질로 본다. 나만 준거군. 뭔가 기분이 뿌듯하다. 이유야 어쨌든 스페셜 대우를 받는다는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토스트와 뭔지 모를 마시멜로처럼 생긴 것도 주신다. 이것도 나만 준건가? 옆에 남자한테도 주는 거 보니 이건 다 주는 건가 보다. 과한 욕심 부리지 말자. 남자들은 조금만 잘해주면 다 심한 착각에 빠진다.


여기 그늘막이 군대에서 보던 딱 그거다. 카투사 시절, 훈련할 때마다 치던 camouflage라고 부르던 그 위장막. 이걸 어떻게 구했지? 근데 이거 구멍이 송송 뚫려 있어서 그늘이 제대로 형성이 되려나 모르겠다. 일단 아침 식사부터 해야지.

아침을 다 먹은 후 커피를 리필하고 앉아있는데, 어제 그 영국 청년이 올라와서 앞에 앉는다. 이 친구는 두꺼운 론리플래닛 책을 가지고 다닌다. 왠지 여행책은 저렇게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면서 해지고 그래야 멋이 난다. 킨들로 들고 다니면 휴대는 용이한데 멋이 없다. 게다가 인덱싱도 개떡같이 되어 있어서 영 불편하다.


헌데, 막상 론리플래닛이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 예전에 인도 다닐 때만 해도 도움이 많이 된 듯 한데, 요즘은 변절된건지, 뭐가 안 맞는 건지 실제로 다니는 곳하고 차이가 있다. 오늘 여기 숙소도 안 나와있고, 내일 바간에서 머물게 될 모두가 머문다는 그곳도 찾아보니 없다. 요새는 어디든 와이파이가 가능하고, 휴대기기가 발전하면서 tripadvisor 같은 사이트들이 더 유용해지고, 론리 같은 책들이 퇴색되고 있다. 그래도 역사나 문화 이런 걸 읽기에는 론리도 썩 나쁘지는 않다.

영국 총각에 이어서 호주 누님도 나타난다. 또 어쩌다 보니 어제에 이어서 오전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상하게 여기 와서 내가 말이 많아졌다. 일주일 동안 말을 못 해서 그런가? 오늘은 문화 차이에 대해 얘기가 나와서 유교에 대한 설명을 한다. 충, 효, 의, 예 등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사실 이게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요즘 잊고 있는 것들이 이런 것들은 아닐까?

결혼 얘기가 나와서 대학교 때 읽었던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책이 내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얘기한다. 당시 금서였어서 몰래 구했던 빨간 책(근데 왜 금서들은 표지를 눈에 더 띄는 빨간색으로 할까?), 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어찌 보면 단순히 가족이 생겨난 과정,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말 그대로 기원을 다룬 사회과학 책인데 읽으면서 너무 나게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족 단위와 국가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그리 생각하고 세상을 보니 당연하지 않음에도 너무나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비로서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진실된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한다고 믿지만 과연 실제로 그럴까?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20살에서 30살 사이에 결혼하게 된다. 왜 사랑은 그때만 하게 되는 걸까? 10대에도 할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을 40대에 만날 수도 있다. 굳이 저 나이가 사랑에 적합한 나이는 아니지 않나. 성적으로 활발할 나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여하튼 사회적인 현상이 무의식에 작용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그래서 저 나이에 억지로라도 진정한 사랑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학문학적으로 파고든 게 아니니 틀린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독신으로 살라고 나는 얘기한다. 그 독신을 깰 만큼의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노코멘트. 

영국 청년은 오늘 태국으로 들어가서 빠이로 향한단다. 아, 이번에는 내가 정보를 줄 차례군. 일단 메인 거리에서는 절대 자지 말 것을 알려주고, 내가 잤던 그 빠이린 숙소도 알려준다. 히피들의 새벽까지 이어지는 음주와 고성방가도 유념하라고 한다. 이 친구 뭔가 예전 인도 갔을 때 델리 들어가자마자 만나서 하루 같이 다녔던 한국인 친구가 연상된다.

인도에서 만난 나보다 열 살 어리던 그 친구는 나와 만난 날이 자신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정보를 내가 많이 얻었고, 그 친구의 마지막 쇼핑하는데는 같이 다녀 주었다. 팔찌, 목걸이 등을 사가서 한국에서 판다길래 잘해보라고 격려도 했었지. 헌데 나중에 한국 돌아와서 보니 아직 그 물건들을 안 팔고 있길래 노여사한테 한번 같이 팔아볼까 슬쩍 물어보니 그러자고 해서 내가 그 물건을 그 친구한테 다 구매했다. 원래 계획은 데이트 삼아 홍대 프리마켓에서 판매하는 거였는데, 그거 6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노여사네 집에 그대로 있다. 노여사가 한번 보더니 이걸 어떻게 파냐며, 자기한테 똥을 줬다고... 그 친구 이거 보고 있으려나?

여행 다니다 만나는 사람들은 나이를 벗어나서 친구가 된다. 이름이 스티븐인 이 영국인 친구도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린지만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를 하게 된다.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닌데, 웃긴 건 한국에 돌아가면 결국 또 형 동생이 되어버린다. 언어가 사람의 관계에서 미치는 효과는 지대하다. '형', '오빠'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친구가 되기는 쉽지 않다.

아침을 같이 먹고 조금 앉아있으니 나를 제외한 둘 다 방으로 내려간다. 호주 누님은 오늘 바간으로 같이 가게 될 거 같다. 스티븐은 오늘 미얀마를 떠나서 방콕으로 돌아간다. 둘 다 내려가고 혼자 남아서 멍 때리며 앉아있는다. 여기 확실히 모래가 많다. 주변에 사막이라도 있는 걸까?

조금 있으니 스티븐이 풀배낭을 메고 옥상까지 인사하러 다시 올라온다. 그래도 어찌 보면 이번 여행에서 짧게나마 가장 길게 얘기를 했고, 또 나름 친구답게 만났던 아이다. 시간이 좀 있고 일정이 맞았다면 며칠 같이 다녀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너, 인생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구나? 내 배낭의 3배는 되어 보인다. 3달 여행 다녀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원래 좀 깨끗한 성격인가 보다.

인사를 나눈다. 언젠가부터 항상 헤어질 때는 "Have a safe trip."이라고 얘기하게 된다. 즐거운 여행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안전한 여행이다. 그러고 보니 내 새끼 발가락은 상태는 어떻지? 며칠 약을 바른 게 효과가 있는지 그래도 좀 많이 나았다. 이삼일 후에 트래킹 할 때까지만 나아다오.

별 생각 없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어제 널어놓은 빨래가 없어졌다. 어제 바람 분다고 누가 치웠나? 그다지 걱정은 안된다. 여기 사람들이 훔쳐갈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건 훔쳐갈 가치도 없는 물건들이다. 내 냄새를 너무 좋아하는 변태라면 모를까.


더워서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방으로 돌아온다. 어제 같이 잤던 사람들은 다 투어를 갔는지 나 혼자 독차지다. 바간으로 가는 버스시간이 좀 남았기에 좀 쉬면서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도 한다. 아 물론 근심도 상쾌하게 내려놓는다. 

그나저나 노여사 절대 경주 따라오지 말란다. 그럼 그때 돌아가기 싫은데... 차라리 연장을 할까? 혹시 싶어서 좀 찾아보니 내가 타고 온 진에어는 한 달이 기한이라 이미 최대치를 써서 연장 할 수가 없다.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항공권은 10표중 8표를 사용하고 두 표가 남아있긴 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진에어는 노쇼처리하고, 마지막으로 방콕에서 라오스 같은 곳으로 에어아시아 이옹해서 이동 후 그곳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인천 경유 일본 같은 곳으로 편도신공 펼치면 딱이긴 하다. 라오스 좋다는데 가볼까 싶기도 한데... 뭐 시간적 여유 있으니 나중에 생각해볼련다. 굳이 지금 결정할 이유는 없지.

빨래는 그나저나 어디로 사라진걸까? 옥상에 한번 올라가 보니 역시 다시 널어져 있다. 바람 때문에 걷었다가 다시 널었나 보다. 근데 현지인들을 자세히 보면 얼굴에 석회 가루 같은 걸 많이들 칠하고 있다. 이게 일종의 화장이라는데, 역시 미의 기준은 나라마다 정말 다 다르다. 나도 저 분 칠하고 현지 바지 한번 입어볼까? 그럼 진짜 아무도 현지인과의 차이를 모르겠다. 훗. 

버스 시간이 대략 돼서 짐을 싸들고 내려간다. 또 다시 울러 매는 가방. 이놈 가볍게 하고 온 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짓 같다. 나오기 전에 짓물린 새끼발가락에 약 바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많이 나았다. 트래킹 하는데는 큰 문제없겠다. 야호!

내려오니 현지 스태프들이 모여있다. 잠시 앉아있으니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게 된다. 언어가 잘 안 통하니 대화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걸릴 뿐 소통은 된다. 

몇 가지 미얀마 단어를 배운다. 일단 안녕하세요, '밍글라바.' 감사합니다, '제주띠마래.' 그리고 숫자들, 아 그새 잊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이 사람들 뭐 이리 해맑을까? 단어를 배우고 있으니 우루루 몰려들어서 자기가 가르치려 한다. 나도 한국어로 숫자를 가르쳐주니 자기들끼리 얘기하며 막 웃는다. 

긍정적인 에너지는 전파된다. 이곳에 있으면 우울할 틈이 안 보인다. 사람들이 뭘 하더라도 긍정적이고 해맑다. 특히 내 반삭 머리를 좋아한다. 자른 보람이 있군. 그 전통 치마와 화장에 관심을 가지니까 다음에 오면 같이 사러 가잔다. 저거 입고 다니면 좀 그럴까? 하긴 뭐 눈치 볼 거 있나 싶다만, 그래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긴 하다. 한복에 대해서 알려주고 사진도 보여준다. 확실히 한복이 아름다워서인지 여자 스태프는 바로 관심을 가지며 비싸냐고 묻는다. 나도 모르게 가격을 500달러로 얘기하고 당황하는 여자아이 표정을 보고서는 잘못했다 생각이 든다.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국에서 왔다니 많이들 관심을 갖는다. 한류가 동남아 전역에 퍼진 건 확실하다. 처음에는 준서, 은서 이러길래 뭔가 싶었는데 '가을동화'를 이곳에서도 방영했나 보다. 나도 재미있게 봤다고 한다. '꽃보다 남자' 구준표 얘기도 하길래 그건 관심 없다고 한다. 남자 따위...

여자스태프가 확실히 나에게 관심이 많다. '대자 뭐 시기'라고 얘기 하는데 뭔지 모르다가 영어로 적는 거 보니 GG, 소녀시대다. 소시의 한문명이 그러했던 거 같다. 이 오라버니도 소녀시대는 한때 미쳐있었단다. 나도 예전 태연 팬이라고 커밍 아웃한다. 물론 지금은 아이유느님으로 갈아탄지 오래지만 말이다.

혹시 다른 가수도 아냐고 물어보니 빅뱅을 얘기한다. 관심 없고, 아이유 아냐고 하니 모른다. 몇 년 지나면 지은이도 이곳까지 알려질까? 지은아, 너는 진정 국내용인 거니? 또 팬심 돋아서 이름을 적어주고 꼭 찾아보라고 한다. 한국에 넘버원 가수라고, 넌 얘만 알면 한류의 트렌드 리더가 되는 거라고 강조한다. 배낭여행인지 아이유 홍보여행인지...

아까 호주 누님 고민하더니 결국 가기로 했나 보다. 내려왔길래 스태프 하나와 같이 셋이서 출발한다. 버스를 타려면 큰길을 건너야 하는데 신호등은 없고 차가 많아서 건너기가 쉽지 않다. 계속 못 건너고 그러고 있으니 길 건너편의 버스 운전수, 스태프, 그리고 주변에 현지인들까지 이 상황이 웃긴지 막 웃는다. 일단 무조건 웃고 보는 거 같다. 이 긍정적인 에너지 어쩔 거야. 이 사람들을 어찌 안 좋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겨우 길을 건너서 버스에 올라 탄다. 스태프에게도 인사하며 나중에 돌아오면 또 보자고 한다. 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거다. 미얀마에서의 첫인상을 너무나도 좋게 만들어준 곳, 다른 곳도 좋을거라 생각되지만 이곳이 나에게는 미얀마에서의 고향으로 여겨진다. 

버스는 4줄이 아닌 3줄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우등고속과 같지만 당연히 그 정도로 훌륭하지는 않다. 그래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에어컨도 나오고 꽤나 편안하다. 특이한 게 얘는 다른 차와 다르게 운전석이 오른쪽이 아닌 정상적으로 왼쪽에 있다. 

바간으로의 5시간 짜리 이동이 시작한다. 긴 여행이니 저번에 보다만 '21세기 자본주의'을 다시 연다. 이런 나라에서 자본주의와 관련된 책을 읽는다는 게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또 그러하기에 오히려 의미가 있다. 모든 건 알아야 한다. 알아야 보인다. 

하지만 피자마자 잠이 솔솔... 그래 일단 한숨 자자. 

...
...

분명히 졸렸는데 왜 눈 감으니 잠이 안 오지? 하지만 또 책을 피면 졸리겠지. 그럼 일단 론리를 피고 바간이랑 미얀마 공부나 좀 해야겠다. 

한두 시간이 지나니 휴게소에서 멈춘다. 내리니 이것 저것 파는 분들이 있다. 지금 시각이 11시 반, 점심이 참 애매하다. 여기에서 뭐라도 먹어야겠다. 

생선 대가리 같은걸 팔길래 자세히 보니 새다. 닭은 아니고, 참새 같은 건가? 얼마냐고 물어보니 1000키얏이다. 뭔가 좀 비싼 느낌이지만 산다.


먹으려고 보니 이거 뭐 살이 거의 없다. 그건 그래도 열심히 뜯어먹으면 되니까 상관없는데 왜 머리를 안 잘라냈을까. 기분의 문제긴 하지만 머리가 달려있으면 뭔가 잘 못 먹겠다. 머리 부분을 안 보이게 손으로 감싸고 다리와 날개를 열심히 뜯어먹는다. 

이거 간에 기별도 안 가겠다. 때마침 호주 누님이 화장실을 갔다 와서 나와 합류한다. 과일 파는 사람이 있는데 누님, 바나나 하나와 망고 하나를 500키얏에 산다. 나는 망고 두개를 조금 흥정해서 500키얏에 산다. 


잘라서 가져다주길래 먹으면서 누님과 얘기를 나눈다. 근데 누님 맞겠지? 서양 사람들은 워낙 늙어 보여서 영 알 수가 없다. 동남아 여행 다닐 때는 망고는 많이 먹을수록 남는 장사다. 망고 두개에 500원이라니, 뭐 거저 아닌가. 

이것 저것 얘기하다 보니 버스에서 타라고 경적을 울린다. 올라타니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하긴 한데 바람이 거의 따귀를 때리는 듯이 강하게 불어온다. 그렇다고 창문을 닫으면 너무 더울 테고, 뭐 참아보기로 한다. 


미얀마는 노래 마저도 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보다 보니 우리들은 왜 이렇게 척박하게 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엄친아들과 엄친딸들이 우리를 이리 만드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누구나 누군가의 첫사랑은 아닐지라도 누구나 누군가의 엄친아와 엄친딸은 맞다. 그리 다른 아들, 딸들과 비교하시며 구박하시는 어머니들도 나가면 장점만 두세배 과장해서 평범한 우리를 엄친아로 만들어 놓는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유령과 경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국에 비해 길이 많이 험하다. 책을 읽기가 많이 힘들다. 조지 오웰의 '1984' 오디오북을 듣다가 다시 이전에 읽던 '21세기 자본론'으로 갈아탄다. 자본을 투자하는 쪽과 인력을 투입하는 쪽, 양쪽에 이익을 어떻게 분배하는 게 맞느냐라는 다소 흥미로은 내용인데, 도저히 집중을 못하겠다. 다음 기회에 보는 걸로. 눈을 감고,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고를 반복한다.




중간에 사원 비슷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바간에 거의 다 왔나 보다. 차가 멈춘다. 이 버스에 같이 타고 왔던 혼자 온 꼬마는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엄마를 보며 반갑게 달려간다. 예쁜 자그마한 가방을 들고 있는 이 여자아이는 어디에서 어떤 일로 이곳까지 온걸까.

한 현지인이 갑자기 버스에 올라탄다. 나랑 호주 누님은 어제 스티븐의 추천으로 ostello bello 게스트하우스로 가기로 잠정 합의를 했었다. 아까 올라탄 현지인이, 그곳은 매우 비싸다, 바간 근처에 2인 35달러이면서 에어컨 나오고 와이파이 빵빵한 곳을 알려주겠다, 라며 유혹을 한다. 글쎄,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바간 유적지 근처는 워낙 외져서 탬플로 들어가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식사나 기타 다른 행동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고 들었다. 나와 호주 누님, 그리고 폴란드 누님 셋이서는 버티지만 나머지 여행자들은 결국 다 끌려간다. 그 사람들은 잘 갔을까.


거부한 우리 세명은 여기서 내리라고 해서 일단 내린다. 다른 버스로 데려다 준단다. 근데 내리고 한참이 지나도 데리러 오는 버스가 없다. 설마... 우리 버림받은 건가? 폴란드 누님이 가장 먼저 그 가설을 제시한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한다. 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 있길래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어가며 놀아준다. 아기는 어디든 똑같다.

조금 기다리니 다행히 트럭이 하나 온다. 여기서 만약 버림받았으면 미얀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이 순식간에 안 좋아질 뻔했다. 다 같이 트럭 뒤에 올라탄다.

거의 30분을 더 간다. 호주 누님과 나는 그래도 이런 저런 대화를 해서 어느 정도 친해졌는데 폴란드 누님은 방금 만난게 처음이다. 이건 내가 심리적인 게 아니라 진짜인데, 서양인들은 동양인과 서양인이 같이 있으면 일단 서양인하고만 얘기를 하려한다. 이 분도 마찬가지로 호주누님한테만 질문을 한다. 나보다 영어도 못하면서. 나도 너랑 얘기하기 싫거든? 그래도 조금 지나니 다 같이 대화를 좀 나누게 된다.

가는 중간 보니 유적지가 정말 온 사방에 있다. 한 군데 모여있다기 보다는 그냥 생뚱 맞게 모든 곳에 흩어져있다. 어찌 보면 오르차와 비슷한 광경이다. 워낙 넓다 보니 돌아다니면서 나만의 포인트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목표했던 Ostello Bello에 도착했다. 아, 이 광경 뭐지? 서양인들만 수두룩하게 테라스에 모여 의자에 등을 느긋하게 기댄체 맥주를 마시고 있다. 이렇게 서양인들만 모여 있는 곳을 몇 군대 본 적 있다. 뭔가 부담스럽지만 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두 여인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버릇인지 일종의 일행이 생기면 자연스레 앞으로 나서곤 한다. 가격을 물어보고, 3명이니 이것 저것 네고와 조율도 해준다. 8인 도미가 12달러인데 지금 자리가 2개뿐이 안남았고, 4인 여성 도미토리 자리가 많지만 21달라란다. 약간 미묘할 수 있는 상황에서 폴란드 누님이 자처해서 21달러 방으로 가기로 한다. 내가 20달러를 내니 7달라만 돌려주면서 잔돈에서 1달러가 부족하단다. 폴란드 누님 방이 21달러이 이분에게 내가 1달러를 받으면 되는데 이분 역시 잔돈이 없다. 결국 1달라 대신 1000키얏을 건네받는다. 내가 약 80원 손해 본 셈이다. 대인배 같으니라고.


폴란드 누님은 그새 우리와 정이 들었나 보다. 무슨 20분 만에 정이... 헤어질 때 되니 뭔가 아쉬워하고 두려워한다. 여행 처음 온건가 싶다. 근데 사실 나는 지금 누구와도 일행을 만들고 싶지 않다. 아직은 뭔가 혼자가 편하다.

폴란드 누님과 헤어지고 호주 누님과 함께 우리의 숙소로 가본다. 8인실에 위 아래 침대가 있어서 어느 쪽을 할지 골라야 하는데, 서로 괜찮다고 미룬다. 사실 나는 괜찮지 않다. 위에 가면 뭔가 삐끄덕 소리가 사람들을 깨울까봐 영 신경쓰인다. 그래서 그냥 당당히 아래를 내가 쓰겠다고 한다. 이제 눈치 보는 여행은 그만.

잠시 앉아서, 도대체 이곳이 어딘지 그리고 여기 느낌이 어떤지 서로 얘기를 좀 나눈다. 나는 이곳 별로다. 미얀마에 왔으면 미얀마스러운 곳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뭔가 너무 휴양지스럽다. 주인도 이탈리아 사람이고, 로비에서 여행 후 처음으로 미국 여자애들도 목격했 다. 전형적인 미국 억양을 여기서 들으니 뭔가 새롭더군. 나는 이곳에 하루 이상 머물지 않을 거 같다. 스티븐이 추천한 이유인 사람이 많이 모이고 정보를 얻기 좋다는 거는 맞긴 한데, 그건 너한테 그렇겠지. 이래서 잘 생긴 놈들은 오징어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거다. 나도 그래서 오징어의 마음을 알기 힘...

근데 시설은 정말 좋다. 화장실은 무슨 호텔 화장실 같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며 이런 저런 배려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은 한 명도 안 보인다. 우리도 이런데 전세내고 좀 버텨야 하는데. 하긴 태국에서 그 많던 한국인들을 미얀마 와서는 비록 며칠 안됐지만 한 명도 못 봤다. 바간에서는 좀 있으려나.

호주누님 뭔가 같이 다니기를 원하시는 눈치이다. 내일 떠나신다더니. 여기 온 가장 큰 이유는 일출 일몰을 혼자 보며 생각에 잠들기 위해서인데 같이 다니면 의미 없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웃기고, 일단 로비에 있겠다고 하고 먼저 나온다.


한 곳에 앉아서 키보드를 피고 글을 좀 쓴다. 나를 중심으로 결계가 하나 생긴 느낌이다. 여기 있는 서양인들은 옷차림도 여행자 옷차림이 아니라 휴양지 차림이다. 조금 있으니 호주 누님도 나와서 프론트에서 지도를 받아온다. 호주누님도 나처럼 거지 복장이라 뭔가 여기 안 어울리긴 매한가지다. 

서양인들은 어제처럼 좁은 곳에서 한두 명 만나게 되면 친해지기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런 곳에 우루루 있으면 뭔가 동양인을 그룹에 끼우는걸 꺼려한다. 어릴 때 외국에 살 때 하도 체감해서 본능적으로 느낀다. 뭔가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기도 하다. 토론대회라도 한번 열어야 하나. 그래서 난 이렇게 서양인들이 그룹으로 뭉쳐있는 곳이 싫다. 괜히 눈치 보는 것도 싫고,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 곳에 있는 거 같다는 느낌도 싫다. 

뭐 또 하루 자고 나면 의견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따 다니면서 숙소도 좀 알아보고 해야겠다. 4시 현재, 지금은 도저히 못 나가겠다. 햇볕이 살인적이다. 한 5시쯤 나가야겠다.

갑자기 옆에 앉아있는 서양인이 말을 건다. 안 좋은 얘기를 잔뜩 써놓은 직후이다. 얘기를 좀 나눠보니 스위스 사람이다. 한국 사람은 처음 본단다. 우리도 좀 뻔한데 말고 이런 곳도 다녀보자. 그분의 여자친구도 같이 대화에 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스위스에는 4가지 언어가 있다고 한다. 한글에 대헤 묻길래 또 세종대왕 블라블라, 하며 설명을 한다. 어쩌면 벽을 치고 있었던 건 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오히려 이렇게 동양인이 없는 곳에서 나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일 옮길래... 여기 싫어... 부담 시러...

5시가 됐으니 슬슬 나가 봐야겠다. 지도를 받긴 했는데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첫날에는 지도보다 발로 동네를 배워야 한다. 바로 앞에서 전자바이크라고 부르는 결국에는 스쿠터인 것을 저녁 반나절에 3000키얏에 빌려주는데 같은 이유로 스킵한다. 미국인들, 원동기로 막 돌아다니면서 포인트만 보고 다니는 게 뭔가 내 맘에 안 든다. 

일단 무작정 걸어본다. 걸으면서 게스트하우스가 나타나면 들어가서 가격을 물어본다. 이 동네 비싸다. 도미가 아니면 기본 28달러는 넘는다. 여기 말고 다른 옵션은 없단 말인가. 


좀 걷다 보니 길을 모르겠다. 중간에 있는 아이들에게 사원 가는 길을 물으니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다들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그래, 안 물어볼게. 


큰 길로 가다 샛길로 들어가본다. 어디 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샛길로 들어가니 완전 다른 광경이 나온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소, 돼지를 풀어서 키우고 있고 굉장히 허름하지만 모여서 티브이도 보고 있다. 

아기를 업고 가는 젊은 엄마가 보이길래 샐짝 웃어준다. 아기가 날 빤히 쳐다보길래 "밍글라바"라고 먼저 안녕이라 인사해본다. 애가 수줍어서 피한다. 어머니 깔깔 웃으시면서 왜 인사를 못해라고 구박한다. 못 알아듣지만, 아마도 그런듯? 


길을 가다 보니 왠 아름다운 강이 보인다. 그쪽으로 들어가는데 왠 오토바이 하나랑 헐벗은 아저씨 하나가 갑자기 뒤에 따라온다. 살짝 무섭다. 골목 안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외국인이 하나도 없다. 살짝 경계모드로 들어간다. 


오토바이 타고 있는 애가 내 옆에 세우더니 영어로 말을 건다. 미얀마에서 들은 영어 중에서 꽤나 상급 영어다. 만달레이에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왼쪽 눈에 장애가 있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살짝 무서워한 게 미안해진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조심스레 말을 섞어본다.

나름 이 동네의 엘리트 자부의식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다. 자기 아버지가 화가였는데 영어를 못해서 관광객들에게 당시에 기념품으로 판매 못했었다며, 자기도 화가이고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하여 만달레이까지 가서 영어를 배운단다. 지금은 방학이라 돌아와서 마을에서 쉬고 있다며, 이곳이 자기 마을이란다. 물론 영어가 아주 훌륭한 건 아닌지라 한참 얘기하니 알아듣는다.


오토바이 뒤에 있는 게 그 그림인가 보다. 뭔가 친근하게 구는데 그림이 궁금해져서 한번 봐도 되냐고 묻는다. 그랬더니 물론이라며, 자기는 지금 영어 연습할 상대가 필요하다며 그냥 부담 없이 보라고 돗자리를 피고 펼친다.


그림은 생각보다 괜찮다. 나름 집에 걸어놓을 만한 작품들이다. 한 장 한 장 펼치며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해준다. 좋은 구경했다며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그 뒤에 있는 다음 그림 꾸러미를 펼친다. 아, 보자고 한 게  잘못했구나.

다음 것도 펼치고, 그 다음 것도 펼친다. 결국 안 물어볼 수가 없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작은 게 7000키얏이란다. 이 나라 기준이면 엄청 비싼 거 아닌가? 내가 미안하다, 그림 살려고 한건 아니다 하며 완곡하게 거절하니 5000키얏에 주겠단다.


아, 이게 아닌데. 그래도 한 30분을 대화하고 같이 돗자리 깔고 앉았는데 안 사기도 뭐하다. 결국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5000키얏에 사겠다고 한다. 비싸게 준 걸까? 혹시  사기당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기당해서 손해가 최대 5000원 정도라면 감수할만하다. 게다가 나름 그림도 마음에 들어서 방에 걸어놓을 수 있을 듯하다. 이 청년과의 만남 과정도 마음에 들고, 앞에 호수의 정경도 너무 아름다워서 그다지 피해를 봤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된다.


그 청년이 고맙다며 옆에 사원이 일몰을 보기 좋은 장소라고 추천해준다. 안 그래도 일몰 볼 곳을 찾고 있었는데 땡큐! 그 청년과 헤어지고, 사원 쪽으로 길을 나선다. 내가 떠나자마자 그 청년 친구들이 청년 주위로 집결하며 서로 막 얘기를 한다.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사원은 은근 바로 앞이다. 그 앞에 강이 예쁘게 펼쳐져 있어서 정경이 꽤나 아름다울 것으로 기대된다. 올라가려고 보니 제일 밑에부터 쫄이가 벗어져있다. 맨발로 올라가는 건가? 쭈뼛쭈볏하면서 옆의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벗으란다. 그렇군. 벗고 맨발로 올라선다.


땅이 뜨끈뜨끈하다. 발바닥에 닿는 땅의 까칠까칠한 감촉이 나쁘지 않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종소리가 은근하게 계속 울려 퍼진다.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니 작은 종이 바람에 살짝 살짝 흔들리며,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있다.


아직 일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수평선에 보이는 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그냥 서서 보기 뭐해서 눈치를 좀 보다가 벽에 올라타고 앉는다. 괜찮나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올라타고 있다. 승려들도 그러는걸 보니 괜찮나 보다. 근데 왜 내가 올라가기 전에는 없었지.


여기서 앉아서 일몰을 보고 있으니 왠지 고산리 기상관측 센터에서 본 일몰이 떠오른다. 거기도 진짜 좋았는데. 벽 끝에 앉아있는지라 뭔가 불안 불안하다. 뒤에서 누가 밀면 어쩌지? 근데 나를 왜 밀겠어. 그럴 가능성이 없는걸 알면서도 살짝 오금이 저린다. 하지만 여기까지 올라와놓고 두려워하는 티가 나면 안되지. 쿨한 척 하며 억지로 분위기 있는 얼굴까지 지으면서 앞을 지긋이 쳐다본다.


해가 구름 뒤로 사라진다. 아, 오늘 일몰 제대로 못 보려나. 다들 안타까운 소리를 낸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해가 그 구름 밑으로 수줍게 다시 얼굴을 들이민다. 그래, 아직 쇼는 끝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해는 더 붉어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밑으로 한 웅큼씩 내려간다.



강과 산과 들, 그리고 구름과 해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듯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쇼는 짧게 끝난다. 해가 산 밑으로 숨고 나니,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사람들이 정신을 다시 차린다. 나도 주위를 이제 좀 둘러보니 현지인들이 매우 많이 보인다. 승려들을 포함하여 현지인들도 이쪽이 관광지로 많이 오는 곳인가 보다.

여운을 즐기며 조금 더 앉아있는다. 그러고 보니 이어폰을 가지고 왔지만 이번에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음악을 준비해왔어도 안 듣게 된다. 자연의 소리, 사람들의 소리가 더 좋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향해야겠다. 슬슬 일어나서 밑으로 내려온다. 내 쪼리는 이번에도 아무도 안 가져가고 살아남았다. 쪼리를 찾아서 신고 길을 나선다.

이번에도 굳이 지도를 보지 않고 걸어간다. 왔던 길로 찾아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내면 거의 모두가 웃음으로 화답한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막상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광경이다.


꼬마들이 지나가면서 "헬로"라고 외치기에 나는 "밍글레바"라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웃는다. 아 사랑스러운 것들. 여기가 관광지임에도 거주하는 사람들은 영향을 거의 안받은 거 같다. 사실 외국인도 지금 있는 그 리조트 같은 게스트하우스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배구를 하며 노는 아이들을 마주친다. 이럴때면 내가 운동을 그다지 잘 못한다는 게 아쉽다. 왠지 여기 앉아서 구경하고 있으면 껴줄 듯 한데. 스파이크 때리고 하는 게 내가 낄 분위기는 아니다. 그러고 보면 난 잘하는 게 뭐지? 조금씩은 다 하는데 막상 잘하는 건 없다. 말하는 거?

한번 길을 헤매고 결국 지도를 편다. 축복받은 구글 지도, 바로 내가 갈 길을 알려준다. 진짜 내가 인생에서 가야 하는 그 길도 얘가 알려주면 참 편할 텐데. 뭐 그러면 또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겠지.

중간중간, 식당들이 보이지만 일단 숙소 근처 갈 때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밥은 안정된 곳에 가서 먹는 것이 좋다. 한 20분 걸었나, 이제 대충 어딘지 알고 숙소가 어딘지 감이 잡힌다.

현지인 식당을 보니 또 어제 식당들과 마찬가지로 백반인 듯하다. 나쁘진 않은데 오늘은 뭔가 다른 걸 먹고 싶다. 주변에 조금 다른 듯한 식당이 보여서 메뉴판을 본다. 고기가 3500키얏, 싸진 않지만 또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주문을 받는다. 그래도 메뉴가 있고 주문을 하는 게 어디냐. 근데 뭘 주문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아무거나 하나 골라달라고 하니 또 그 당황하는 웃음을 짓더니 그래도 닭고기와 파인애플 조합을 추천한다. 콜!

콜라도 하나 시킨다. 1000키얏인데 병이 아니라 캔이다. 얼음도 없단다. 그래 주어진 거에 만족하며 먹자. 조금 기다리니 닭고기가 나온다. 흠, 비주얼은 조금 실망이다. 밥을 먹을 거냐고 해서 달라고 한다.


밥도 와서 같이 먹어본다. 고추 마늘 소스가 나오는데 이게 딱 내 스타일이다. 역시 고기에는 고추와 마늘이지. 고기와 파인애플을 밥에 올리고 고추, 마늘을 담은 소스를 그 위에 뿌린다. 한 숟가락 먹음직스럽게 퍼서 한입에 집어넣는다. 오, 생각보다 맛있다.

배고팠나, 순식간에 다 먹는다. 생각해보니 오늘 제대로 된 첫끼다. 배고픈 게 맞네. 그리고 미얀마 와서 먹은 제대로 된 첫 밥인 거 같기도 하다. 미얀마식 백반은 배는 채우는데 솔직히 맛은 그냥 그렇다. 차라리 태국처럼 향신료가 강하거나 그러면 나름 즐길 텐데, 백반은 그냥 집에서 밥을 먹는 그런 느낌이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5000키얏이다. 좀 과소비이긴 한데, 그래도 만족스럽다. 그럼 오늘 얼마를 쓴 거야. 너무 많이 썼나? 대충 계산해보니 버스 9000키얏, 숙소 19,000키얏, 그리고 저녁 5000키얏, 총 33,000키얏이다.  흠, 생각보다 많지 않네? 숙소 들어가서 맥주 한잔도 마셔야겠다.

숙소로 돌아오니... 여기가 미얀마인지 프랑스의 어느 바인지... 서양인들끼리 다들 모여 한잔씩 하고 있다. 동양인은 단 한 명도 안 보인다. 아 위화감 드는구먼. 그런다고 내가 쫄소냐. 난 꼭 맥주를 혼자 마시고 말테다.

일단 씻으러 간다. 씻고 나오니 호주누님과 다른 여자 한명이 방에 같이 있다. 다른 여자분은 홀란드에서 왔다고 한다. 또 묻는다. 두유노 히딩크? 이분은 안다. 그럼 그렇지, 모르는 게 이상하다. 아까 산 그림을 보여주니 예쁘다며 성화다. 5달러라니 또 싸다고 그런다. 나  사기당한 건 아닌가 보다.

맥주 마시고 오겠다고 하고 나온다. 아 저 서양인 패거리들.... 무셔... 그래도 난 마신다!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리 하나가 보인다. 그래, 저기 앉으면 되겠군. 배트맨도 외롭게 어두운 곳에서 혼자 싸우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맥주를 사러 가니 큰 게 2500키얏이다. 은근 싸지는 않다. 하나 사와서 그 구석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펴고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정리한다. 글을 써서 참 다행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기 앉아서 맥주 마시고 있으면 진짜 찐따처럼 보일뻔했다.


내일은 어쩌지? 이 게스트하우스에 계속 머문다면 이유가 시설이 제일 좋아서가 아니라, 희한하게도 가장 싸기 때문이다. 다른 곳은 도미토리를 취급하지 않아서 보통 2인실에 30달러 정도 한다. 두 명이면 갈만한데 나 혼자서 가면 너무 비싸다. 그렇다고 호주 언니랑 방을 쉐어 하자고 하기도 애매하고... 하자면 할거 같긴 한데, 난 누군가한테 죽겠지. 일단 내일 일어나서 생각해봐야겠다. 여행에서는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가 30%를 차지하는데 여기 게하가 마음에 안 들다 보니 동네가 마음에 들어도 뭔가 시작과 마무리가 불편해서 싫다.

그래도 이 동네는 괜찮은 거 같다. 완전 딱 내 동네다, 이런 느낌은 아직까지 아니지만 하루 만에 그럴 수가 있나. 오늘 갔던 길을 매일 다니면 현지인들과도 조금 친해지고, 나만의 장소, 나만의 일출, 일몰 포인트, 책 보는 장소 등을 탐방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래 머물지는 미지수다. 여기 그래도 조식은 좋아 보이던데, 기대해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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