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울 지, 이치 리, 산 산
올해로 5번째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다. 주변에서는 힘든 고생을 하면서 산에 왜 올라가는지 궁금해한다. 처음엔 친한 술집 사장님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그 해에는 전혀 운동을 하지 않을 때라 오를 때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꾸역꾸역 정상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내가 2박 3일 고생해서 지리산 종주도 했는데 못 해낼 일이 무엇이 있겠냐는 생각에 정신이 강해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매년 지리산 종주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몸과 정신의 건강함을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매년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2달 전부터 집 앞 산을 등산하면서 좀 더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준비를 했다. 그래서 내 목표는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의 산행은 달랐다. 7년간 불운한 가정사로 잠수를 타던 후배를 만났고 자신도 자신감을 얻고 싶다는 말에 올라가긴 힘들 몸인데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장님께 부탁하여 데리고 가기로 했다. 역시나 다른 친구들의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올라가다가 몸에 이상이 왔다. 오르기 시작한 지 6시간이 지나자 계속해서 쥐가 나기 시작했고 쥐가 나는 다리를 붙잡고 휘청이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왔다. 데리고 온 책임이 있기에 나도 올해는 선두에서 내 페이스대로 달려 나가지 않고 후미에서 걸음을 맞추면서 갔다. 후미에서 걷는 것이 선두에서 걷는 것에 두 배는 힘든 거 같았지만 등산이라는 것은 가장 먼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번 산행을 얼마나 즐기고 느끼고 있는가이다.
류시화 시인의 수필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 이런 말이 있다. [회사를 휴직하고 한 달간 제주살이를 시작한 독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제주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무척 실망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정색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이곳 제주도가 당신이 생각한 제주도여야만 하죠? 자신의 관념 속 제주도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제주도를 경험하기 위해 한 달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 게 아닌가요?”... 중략...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중략... 만약 내가 이 세상 떠나며 영혼들의 교차로에서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려고 엇갈리는 한 영혼을 만난다면, 나는 그 영혼에게 말하리라. “당신이 상상하는 지구 행성이 아닐 거야.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이 아닐 거야. 그래서 하루하루가 난해하면서도 설레고 감동적일 거야. 자신의 관념과 기준 속에 갇혀 있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면”]
그렇다 선두로 달려가서 결과를 성취하려고만 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많이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올라가는 길의 풍경, 결국 후배와 중도에 하산하면서 부모님 얼굴을 하루 더 볼 수 있는 소중함이 있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어디 있을까? 난 다른 사람보다 유독 나의 관념에 갇혀 산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제주도에서 만난 친구가 “넌 남의 말 절대 안 듣는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말을 했다. 인생 5회 차 선배(나이는 어리지만)이기에 곧 씹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하나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인생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다. 너무나 힘들고 가진 거 없는 삶에 이 무슨 개소리인가 할 수도 있지만 산을 종주하다 보면 느낀다. 편안한 잠자리, 시원한 콜라 한잔, 씻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만 걱정이 많아 편하게 잘 수 없고 도파민이 넘치는 삶에 무덤덤해지고 매일 출근길 반복되는 삶에 지쳐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편안한 잠자리와 먹을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지구상 인구에 25%에 해당하는 부자라고 한다. 부자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가진 행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지혜를 나는 지리산을 오르면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