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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Youngju)>는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났던 영주에게 향숙이 말한다. 영주는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하나뿐인 남동생 영인에게 밥을 차려주곤 대학을 보내주겠다고 호기롭게 말한다. 고모와 고모부가 동생을 흘길 때, 서슴없이 그를 감싼다. 그렇게 감싼 영인이 말썽을 피워 없는 돈을 마련해야 할 때도, 그토록 지켜왔던 부모님의 집을 팔려고 하는 자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을지언정 영인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다. 그저 밥은 먹었는지 걱정이 된다. 변변찮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부모님의 제사상을 차리고, 두 손으로 엄마와 아빠의 영정사진을 나란히 세운다.
고작 며칠 동안 영주를 겪어낸 향숙은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집 안에 보살펴주는 어른 하나 없이 자라야 하는 시간을 영주가 버텨온 것처럼, 향숙은 일어날 가망 하나 없는 아들의 손을 닦으며 매일을 흘려보낸다. 그 지난한 일상 속에 맑고, 그늘진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들어온다. 보호막 없이 버틴 야무진 손끝과 눈빛을 향숙은 곧 눈치챈다. 영주 또한 한결같이 아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 온 향숙의 시간을 알아챈다. 그들은 서로 좋은 사람임을 안다, 그리고 각자 버텨온 시간을 보담는다.
영화는 그에 못지않게 상문도 좋은 사람임을 내비친다. 불의의 사고는 음주운전이 아닌 졸음운전으로 일어나며, 그는 여전히 자신 탓에 세상을 등진 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아저씨도 많이 괴로워하셨어.'라는 영주의 말은 상문을 향한 부분적 면죄부와 같다. 영화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상문과 향숙, 그리고 영주를 좋은 사람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묻는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가해를 저지른 이와 피해를 받은 이가 존재한다. 둘 다 좋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서로 애정과 위로를 느낀다면 이 관계를,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지만, <영주>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건으로 인해 바뀌어버린 환경을 어쩔 수 없이 삼켜내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주와 더 깊숙한 애정 관계를 쌓는 사람이 상문이 아니라 그의 아내, 향숙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녀는 영주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정의될 수 없다. 피해자인 영주의 부모님은 그녀의 말대로 '그렇게 가버'렸을 뿐이고, 영주는 피해자의 딸로서 입은 상처를 문질러내며 살아간다. 향숙은 가해자의 아내인 동시에 불의의 사고로 침대에 누워있는 피해자 아들의 엄마, 이중의 역할을 감당해나간다.
영주는 향숙에게 말한다. '내가 같이 있어도 되는 것이냐고, 내가 이렇게 당신을 좋아해도 되는 것이냐고.' 후에 영인이 말한 것처럼, 그녀도 이 관계가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불행을 당신이 자초한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영주는 그 사실을 지우고 싶다. 어차피 세상에 자신이 가지고 싶어서 가진 입장은 별로 되지 않으며, 부재로 인한 시간을 견뎌내는 것에 이골이 난 그녀는 애정과 공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너무 소중하다. '누나가 있어서 좋지? 내가 너 졸업도 시키고 대학도 보내줄 건데?'라고 말하곤 곧 '부모님이 뭘 해줬는데? 그렇게 가면 다야?'라고 소리치는 영주의 마음을, 그 복잡성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긴 섣부른 것처럼.
영인의 도발에 영주는 목소리를 높인다. 모두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쉽게 말하지만, 이 관계는 아니야, 그렇지 않다고 영주도 믿고 싶었을 것이다. 가만히 문자의 커서를 바라보던 영주는 곧 연필을 집는다.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죄송합니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 향숙이 얼마나 힘들어질 것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진실을 아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겪어냈다. 자신이 감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다른 이를 끌어들일 수 없다고. 그래서 연필을 꾹꾹 눌러 한 문장을 적는다. 영주와 향숙이 갖는 서로를 향한 애틋함은 공통적으로 가진 사건으로 인한 상처와 시간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꾹꾹 눌러쓰던 마지막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주는 왜 상문과 향숙에게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했을까. 그것이 한낱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려는 창작자의 못난 심보처럼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영주는 마냥 천진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기대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아 보고 싶었던 걸까. '이렇게 좋은 관계가 있어요.'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영인에게 보내려던 '네가 틀렸어.'라는 문자 메시지처럼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 정보의 불균형이, 입장의 불균형이 그들의 관계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이 좋은 관계는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당연히 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입체적인 인물과 도발적인 상황 설정에 비해, 영화는 끝을 향해가면서 창작자가 만들어 놓은 수식을 무시한다. 공들인 설정을 바탕으로 던졌던 질문을 배우의 연기에 온전히 내맡긴 납작하고 전형적인 결말은 안타깝게도 무책임해 보인다. 배우의 연기에만 기대어 결말을 전개해나간 것처럼 영주에게 아무런 대답도 시선도 가지지 못한 영화는 도발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한다. 섬세한 질문을 뭉툭하게 맺어버린 영화가 아쉬운 이유다.
향숙의 아들을 바라보던 영주는 그에게 속삭인다. '너는 좋겠다. 엄마가 있어서.' 그러다 깜박 잠이 든 영주는 이내 향숙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이제 내가 그 아이의 얼굴을 어떻게 보느냐고, 차라리 오지 말 것을, 만나지 말 것을.' 영주는 향숙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향숙은 이제 영주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고 위안받던 관계는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는 만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향숙은 영주의 슬픔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더더욱 볼 수 없다. 좋은 아이와 좋은 사람의 만남은 파국으로 끝났다. 다리 위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은 영주는 마저 남은 다리를 건너고 어떤 사람이 돼있을까. 그녀는 이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영주(Youngju)>, 차성덕,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