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있는 '북경'
몇 해전 일이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가까운 후배가 유럽 여행을 갔다. 그녀는 파리에서 벨기에로 넘어가려고 기차역 발매 창구로 갔다. '아이드 라익 어 트레인 티컷 투 벨기에, 플리즈...' 창구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못알아 듣는 표정을 지었다. 후배는 프랑스 발음을 흉내내 혀를 굴리며 말했다.
그래도 못 알아 듣자 천천히 말하기도 하고 빠르게 성조를 넣기도 했다. 이마가 넓고 눈이 작아 선해 보이는 그녀는 그때 상황을 떠올리며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가 내려오며 몇 번을 '벨기에'를 외쳤는데 알고 보니 '벨.지.움'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볼멘 소리로
외국인들도 처음 가 본 나라의 지명을 잘못 알고 있거나 현지인들과 다르게 부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22년도 그랬던 것일까? 내셔날지오그래픽 취재원이 서울을 방문했다고 썼는데 '만리장성' 구경한 기사를 실었다. 그당시 중국은 외국인들에게 '서울, 코리아'로 불렸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 서울에서 북경을 구경하고 그레이트 월을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취재에 의하면,
https://www.loc.gov/resource/sn86091100/1922-07-06/ed-1/?sp=5&r=-0.485,0.173,1.58,0.707,0
취재 기자는 북경과 인디펜던트 게이트를 빠져나와 산들 사이로 굽이치는 아름다운 길을 지나간다. 난공불락의 만리장성 건축 기술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장성의 일부분은 강 위를 지나가는데 그 아래로 아치형의 강철 수문이 내려와 도시를 굳게 보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떡메치는 사람들과 방짜 유기를 쓰는 사람들을 묘사 하다가 그레이트 월을 구경한 얘기를 읽으며 기자가 서울과 중국을 혼동하고 썼구나 싶었다. 그가 하늘을 나는 인력거를 타고 서울에서 중국을 갔으면 모를까. 1888년에 설립된 세계 최대의 비영리 교육, 과학 기관이 쓴 기사를 오류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러기엔 'Seoul, Corea'의 만리장성 얘기가 흥미로웠다.
우리가 만리장성하면 지금의 베이징 북쪽으로 62km 떨어져 있는 '거용관'의 산성을 떠올린다. 산맥을 따라 벽돌로 지은 성벽의 위용에 전세계인들이 찾아온다. 그런데 신문 기사의 '그레이트 월'은 도시를 감싸고 있는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을 뜻하는 페킹(peking)과 그레이트 월을 찾아봤다.
지금의 '페킹(Peking)'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며 상하이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 '베이징'으로 알려졌다. 한자 '북경(北京)'의 독일어 발음이 페킹(Peking)이다. 폴란드와 프랑스어로는 '페킨(Pekin)'이다.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진 강아지 품종의 하나인 '페키니즈(Pekingese)'는 페킹(Peking)에 'ese'가 붙어 '북경의, 북경 사람'이라는 뜻과 같이 쓰인다.
북경의 다른 이름은 '페핑(Peiping)'이다. '북평(北平)'의 영어식 발음이다. 북평은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지리지 1권에 수도 서울이었던 경도(京都)는 '개성부'와 '한성부'가 있었다. 경도의 동쪽에 '북평관'이 있었는데 야인들이 내조할 때 '대기' 하던 곳이다. 임진란 때 이곳을 없애 버렸다. 오죽하면. '페킹, 페킨, 페핑' 모두 북경을 가르킨다. 하나 더 있다.
아래는 MIT 공대(메사추세츠) 교수가 2002년에 설립한 문화 시각화 연구에 올라온 자료이다. '페호(PEI-HO)에서 북경(PEKIN)까지 중국의 교란지역 조감도'이다. 이 지도는 189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8개 연합국가가 북경을 침략해 황실의 보물과 재산을 약탈 방화하고 전쟁을 일으킨 사건과 연관된 조망도이다.
제목에 나온 '페이-호'는 '백강(White River, 白河, 北河)'을 뜻한다. 백강하면 나당연합군과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싸운 장소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백강에서 천진을 거쳐 북경까지 철도와 강의 흐름, 4개의 도시로 이뤄진 북경과 그 전체를 만두처럼 감싼 '그레이트 월'을 볼 수 있다. 잠시 감상해 보면 '그레이트 월'에 관한 개념이 지금처럼 산성을 뜻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개념이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다. 페호라는 강의 하구와 북경까지 거리가 약 170Km이다. 서울에서 강원도 거리다.
아 지도에서 북경을 가르키는 또다른 말을 찾을 수 있다. 조감도 오른쪽 하단에 '페칠리만의 전함(warships in gulf of pechili)'이라는 글귀가 써 있다. 백강을 거슬러 북경으로 출격 명령을 기다리는 전함들이 대기중인 바다명이다.
처음에 '페칠리'가 어느 해안을 뜻하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독일 자료를 보니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구역이 한자로 '직례(直隸, Zhílì)'인데 북쪽을 뜻하는 베(Běi)가 붙어서 '페-칠리'가 된 것이다. '직례(直隸)', 또는 '직리(直隶)'를 '바이질리(Běi Zhílì)' 혹은 '페-츨리(Pe-Tschili)'라고 하거나 영어로 '페칠리(Pe-chili)'가 된 것이다.
북경을 뜻하는 '페킨, 페킹, 페핑,페칠리'에 '조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시의 기원과 계통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유득공의 '고운당 필기'에 조선진(朝鮮津)의 아전이었던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남편의 직업과 애환을 그린 시가 실려있다. 그녀가 자신을 '조선진'의 하급 관리였던 아내였으며 서양의 '하프'와 같은 악기 '공후'를 연주하며 부른 세레나데이다. 하프의 선율이 강가에 잔 물결을 일으키며 애절함을 느껴본다.
그녀는 자신을 '조선진에서 아전을 했던 곽리고자의 아내'라고 밝혔다. 여기서 조선진을 북경에 있었던 '조선현'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조선진의 진(津)은 '천진(天津)'할때 '진(津)'으로 나루터, 강가를 의미한다. 페리(ferry)나 요새(ford)를 뜻한다. 북경을 지키는 요새 이름이나 부서명이 '조선진'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근무했던 남편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던게 아닐까.
단 한 줄의 기록이지만 북경을 사수하는 곳의 이름이 '조선진'임을 유추할 수 있다. 북경을 뜻하는 페칠리의 한자 '(북)직례' 혹은 '직리'는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지 17년 되던해이다. 예조에서 과거 시험을 정비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왕이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가 '직례'이고 넓게 봐서 경기도를 감싸고 있는 성이 '한성'임을 예측해 볼 수 있다. 태종은 이를 윤허한다. 그전에는 경기도에 살고 있다고 해서 모두 시험을 치를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형법서 '대명률직해'에 노역을 살아야 하는 죄인들이 직례(直隷)에서 온 사람들은 산동(山東)의 염장으로 보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철을 캐내는 곳으로 보낸다는 기록이 있다. 직례의 죄인들은 염장에서 매일 소금 3근을 구워야 한다. 외국인들은 왕이 거주하는 곳을 직례, 직리로 부르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영어 풀어 쓴게 아니라 한자를 그대로 발음해 '칠리만(직례만:直隷灣)'이라고 했던 것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북경이 지금의 중국 베이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좀더 포괄적이고 연합된 형태를 확장시켜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진 용어 '페킨'이 지구상에 남아서 존재하는 곳이 있다. 미국 중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시카고' 남쪽에 페킨(Pekin)이라는 유서 깊은 도시가 있다. 그들이 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명을 '페킨'이라고 썼는지 밝힌 자료에 의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이 중국의 북경(예: 북경 또는 베이징)과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Pekin"이라고 작명을 했다는 것이다.
시카고의 페킨(Pekin)은 북경을 지칭하고 북경이 우리나라 서울, 코리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해 보면 시카고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하얗고 큰 '오리' 품종을 '페킨'으로 부른다. 북경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베이징 카오야'인줄 알았다. 미국에서 페킨이 오리이고 오리가 북경이며 지구 반대편의 북경을 도시명으로 지은 일리노이주를 여행할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가보리라!
당시 코리아를 여행한 많은 사람들 중에 미국의 배우이자 작가인 '루이스 조던 밀른'은 '옛스런 코리아(Quaint Korea)'에서 코리아 사람들은 '타타르에 가깝다'고 했다. MIT 공대의 '페호에서 북경까지' 조감도를 보면 북경은 모두 4개의 도시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북경 맨 앞이 '차이니즈 시티'이다. 그 다음으로 '타타 시티'가 있고 그 안쪽으로 '임페리얼 시티'가 있다. 그 뒤로 '포비든 시티'가 있다. 자금성을 말한다. 3개의 도시가 방패막처럼 황제 도시를 막고 그 뒤에 금지된 도시가 자리했다. 서양에서 제작한 또다른 지도를 보면 '차이니즈 시티'는 '외곽 도시'로 기술했다. 황제와 더 가까이 있는 내부 도시는 '타타 시티'라고 돼 있다. 어느 나라일까?
타타르는 달단(韃靼)이나 몽골, 러시아로 알려졌다. 만리장성의 '타타시티 구간'을 보면 '낙타'를 끌고 가는 '아랍계' 복장의 상인들 혹은 유목민들을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러시아어로 '코레아 후라(코리아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그 긴박하고 중요한 순간에 왜 러시아 말을 했을까 수년간 의문이었다. 러시아 사람인가? 한 때 의심도 했었다.
작가 '루이스 조던 밀른'이 코리아가 타타르 사람과 가깝다고 했을때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고종이 러시아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난 곳도 새롭게 조명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코가 크고 눈이 큰 러시아 여성이 자신은 고려 사람이라며 한국말을 하고 코리아인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국인의 신체적 특징과 범위를 확장시켜 보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독립운동가 후손분들을 직접 만나볼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전 국회의원 이종걸씨의 선조 우당 이회영, 이시영 부대통령 일가분들과 김구, 석주 이상룡 선생들 사진을 보면 '중국옷'이라고 알려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겨 어떤 역사학자에게 여쭤보니 '북경으로 망명해 그나라 옷을 입었던 게 아니냐'는 답변을 들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념 사진을 찍으며 의복을 고심했을텐데 중국옷을 입었을까 했다. 그런데 '중국과 조선'을 둘로 나눠서 배웠기 때문에 드는 의문이고 100년전 서울 코리아를 북경과 같은 개념으로 살아갔던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외국에서 온 기자나 여행 작가들이 글을 쓴 19세기 말에는 1911년에 만들어진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의 중국은 '코리아'가 더 상위의 개념이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만주에서 비단 장사를 한 나의 증조 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는 무려 100세를 넘게 사시면서 한복만 입고 계셨다. 독립운동가분들의 중국식으로 알고 있는 전통 복장과 나의 증조부들의 조선식 한복은 어떤 개념이었는지 당대로 돌아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저 사진과 남아 있는 자료, 개인적 경험으로 유추해 보고 만다.
아이다호의 기사와 페킨 조감도, 우리나라 사서에 등장하는 '직례'를 통해 Corea에 등장하는 '만리장성'이 세종실록에도 나온 얘기를 들추고자 한다.
이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