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련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중민청 #민직청
내 팔자 내가 꼰 해는 고등학교 1학년때다. 남부군이라는 소설책을 읽고 뒷통수를 얻어 맞았다. 초록색 잔디밭에 떨어진 붉은색 삐라를 주워 선생님께 드리며 뿌듯해 했던 기억이 났다. 침을 흘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북한군 늑대가 선량한 남한 사람들을 죽이던 만화가 떠올랐다.
6월이면 반공 포스터 그리기와 글짓기 대회에 참가해 상을 받았다. 연필심 냄새를 맡으며 국군 장병 아저씨들께 위문 편지를 쓰느라 끙끙 댔었다. TV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간첩사건,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났다. 밤마다 전쟁이 나는 악몽을 꿨다. 공포감을 조성해 정권을 유지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고 살았다.
연신내에서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몸은 학교를 다녔지만 정신과 마음은 사회 변혁을 꿈꾸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그때 독서습관으로 '소설책'을 못 읽는 질환에 걸렸다. 진지충이 된 것이다. 김근태 선생님의 고문 이야기가 담긴 '말'이라는 잡지도 구독했다. 독서모임에서 나가 나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동급생을 감지했다. 그녀에게 접근했다.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태백산맥이나 토지 같은 전집류의 책을 읽는 다독가 였다. 모르는게 없었다. 조금 친해지자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평범하지 않는 기운을 풍기 내면에는 성폭행 당한 아픔이 있었다.
마침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결성돼 타학교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생겼다. 주말이면 서울시내 유명 대학 강의실에 갔다. 광주에서 올라온 남학생들도 있었다. 사회도 잘보고 말도 잘했다. 구호도 잘 외쳐 얼굴이 붉어지며 혼자 사모했다. 남학생들과 둘러 앉아 토론할 때면 심장이 두근거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사회변혁은 핑계고 남녀상열지사를 꿈꿨던 게 아닐까. 그런 자리에 말을 똑부러지게 잘하고 매력있게 보이고 싶었다.
어느날 불테 안경을 쓴 친구를 복도로 불러냈다. 운동권에 아는 선배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 사회 과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고 싶은데 '누구 없을까' 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던 친구 입술에서 '좋은 선배가 있다'며 이미 운동권에서 '활동중'이라고 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냥 멋있게 느껴졌다. 역시 마당발에 모르는 게 없는 친구다. 얼마뒤 운동권 선배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받아냈다.
그녀는 개띠 에이비형에 흔하디 흔한 김자 미자 영자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 공중전화 박스에서 줄을 서야 했다. 쉬는 시간 총알같이 공중전화로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동전을 넣었다. 뚜뚜뚜 신호가 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누구 소개로 전화했는데요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생각하고 연습한 말을 토해냈다. '그래? 얘기는 들었다' 시크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일요일 어느 오후 집으로 찾아 오라고 했다.
그때는 네비게이션 같은게 없었다. 알려주는대로 찾아가야 했다. 중간에 전화기도 없으니 집을 못 찾으면 낭패다. '어느 골목길로 들어오면 슈퍼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세탁소가 나오고 거기서 직진해서 왼쪽으로 꺾으면 파란 대문이 나오는데 초인종을 눌러라'고 했던 것 같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궈 수화기를 어깨에 대고 수첩에 좌측, 우측, 세탁소, 슈퍼, 옷가게 등 찾아갈 점들이 될만한 이름과 위치를 휘갈겨 받아 적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성신여대가 있는 돈암동이었다. 북촌에 있는 한옥 형태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낯선 골목길을 따라 수첩에 적은대로 점들을 찾아갔다. 자취방은 단층집 1층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좁은 마루가 딸린 방문을 열자 오래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같이 사는 사람이 담배를 핀다고 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왔다. 문을 열어 놓고 마주 앉았다. 그녀도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다. 왜 독서를 많이 하고 아는게 많고 똑똑한 사람들은 검정 뿔테 안경일까.
그녀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산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지하 써클 활동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을 품은 것 같았다. 쌍거풀 없는 속눈썹은 까맸다. 눈매가 넓었고 광대뼈가 조금 나왔다. 얇은 입술은 선명했다. 말을 할 때 코를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무서운 운동권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똑똑하게 보이고 싶어 애를 썼다. 눈에 강렬한 선광을 뿜으려 그녀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뒤를 따를만한 인재처럼 보이기를 바랬다.
첫 대면이 끊나고 다음에 만날때 무슨 무슨 책을 읽어 오라고 했다. 나는 얼마동안 그녀와 공부를 했다. 운동권 돌아가는 판세를 들려줬다. 그녀가 활동하는 단체에 있었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민청련 산하중에 '중부지역민주청년회'가 가장 성실하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그리로 가서 활동하라고 했다. 그중 김모씨가 있는데 그를 따르라는 '지령'까지 받았다.
그때는 그녀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기세였다. 얼마전 그녀의 생일이었다. 은동으로 된 '괄사 마사지기'를 카톡 선물하기로 보냈다. 얼굴 한번 보자며 한 해 두 해 미뤘다. 말나온김에 백석 교보문고에서 만났다. 자신이 기다리는 카페 사진을 찍어 보내 '이쪽'으로 오라고 했다. 돈암동 자취방을 찾아갈 때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카페 한켠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옛날처럼 두꺼운 뿔테지만 좀더 세련되고 고가인 듯한 밤색 안경을 썼다. 대충 머리를 묶어 머리카락이 귀 옆으로 삐져 나왔다. 왼쪽 팔 안쪽에는 흘림체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카라가 없는 토미 힐피거 티셔츠에 통이 넓은 베이지색 바지를 입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두서없이 쏟아냈다. 사회변혁은 온데간데 없고 연로하신 부모님 병원비 대는 얘기, 눈에 노환이 온 얘기, 어느 병원이 좋고 어느 것을 먹으면 좋은지 정보를 쏟았다.
딱히 내세울게 없는 나는 말이 많아졌다. 요즘 주된 관심사인 '사주명리' 공부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여전히 뭘 배우고 있구나', '하여튼 특이해'가 나에 대한 평이었다. 요즘 어디서 일하는지 물었더니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민주노총 법무팀에서 일한다고 했다. 평생 공부만 한 언니는 그때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그녀를 만나면 '남부군'이 함께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쉰들러 리스트'라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영화를 단체관람 했었다. 나치 수용소 이야기,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 배경 같은 지식이 생겼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전범들을 찾아내 국제 재판을 하고 있다. 독일은 현재까지 그들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다. 잘못한 것에 대해 관용이 없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얼마전 이선균의 '행복의 나라'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대통령을 사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따르고 군인정신을 따르는 원칙주의자는 사형을 당한다. 그의 비참한 죽음과 아름답게 묘사된 영화와 달리 반군인정신의 사례가 '남부군'의 배경이다.
1945년 해방후 남한 단독 정부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3.1운동처럼 전국에서 반대하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런 사람들을 떼지어 학살한 사건이 4.3제주 항쟁의 사례이다. 자국민을 사살하라는 명령에 항거해 반군이 된 군인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됐다. 그들을 색출하느라 여수, 순천의 무고한 백성들을 떼지어 학살한게 '여순반란 사건'이다. 반란이 아닌 '여수, 순천 양민학살 참사'이다. 적군도 아니고 무장도 하지 않았다. 항명한 군인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모아서 죽이고 불태웠다. 자국민을 삭제하듯 학살했다.
아버지의 행방을 묻은 경찰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준 구례군 산동면의 어린 아들은 평생 죄의식을 갖고 노인이 됐다. 며칠동안 시체 타는 냄새가 났던 동네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혹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했다. 왜 '진실 처벌 위원회'가 아니라 '화해 위원회' 일까? 가해자 입장에서 과거사를 정리하고 마무리 짓고 싶었을 것이다. 남부군 덕에 연결된 김미영을 보면서 어떤 작은 죽음하나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