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래된 투쟁에 관하여
학교 가는 길
어떤 영화인가 하고 찾아봤다가, 가양동에 설립하기로 했던 ‘특수학교’를 두고 지역 주민과 장애 아동의 어머니들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내용이라는 것을 보고 단번에 안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내가 너무나 질색하고 싫어하는 사건이었다. 약아빠진 정치인들의 입놀림에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 서로에게 칼을 꽂는 상황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지 않았다. 일면에는 어머니들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저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싸움을 붙이는 토론회에 갈 필요도 없고, 목소리를 높여 울부짖을 필요도 삭발을 감행할 것도 아닌 일이었다. 더군다나 어머니들께서 뛰쳐나와 욕설을 내뱉는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가양동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여러 번 고민했었다. 허준 거리를 갔다가, 서진 학교를 보러 갈까 했지만 몇 번을 그만뒀었다. 그만큼 이 영화를 피하고 싶었는데, 또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영화가 끝나고 정말 많이 반성했다. 나 역시도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판단하고 있었고, 너무 쉬이 마음을 결정하고 닫아뒀었다. ‘학교 가는 길’은 어느 한쪽의 이야기 만을 강조하거나 일방적으로 설득시키는 영화가 아니다. 한 순간의 장면만을 보여주거나 어느 시기의 사건만을 다루지도 않는다.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사람들 사이에 쌓였던 울분과 서러움, 차별과 억압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하나씩 보여줬다. 조금씩 이해가 될수록 눈물이 났다. 사실 눈물 나는 영화가 아니라, 중간중간 잠시 눈물이 마르는 영화다. 그 찰나를 제외하고는 내내 눈물이 난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처참하고 한탄스럽고 괴롭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많은 이들이 크게 모욕했다. 왕이라는 자가 왜 이렇게 처참한 꼴로 죽느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나 약함의 상징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완전한 승리였으며 가장 위대한 강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 일을 선택하셨다. 이를 통해 보여줄 더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릎을 꿇은 어머니들을 보며 그제야 그 강함이 보였다. 굳이 그 싸움터로 가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하지 않아도 되는 삭발을 하고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건 가장 약한 모습이 아니라, 한 아이를 지켜내는 어머니의 가장 강한 모습이었다. 차별로 얼룩진 세상을 닦아내는 위대한 몸짓이었다. ‘장애, 여성, 엄마’라는 가장 약해 보이는 단어들로 이뤄진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목소리였다.
4월 20일은 세계 장애인의 날이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있었다는 것조차 웃으며 넘길 날이 오면 좋겠다. 이런 시절이 있었다며 놀랄 때가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모두가 어우러져 서로 다른 각자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함께 살아가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