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을 들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자
친구와 둘이서 밤길을 가고 있다. 으슥한 좁은 골목을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우리보다 덩치가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걸어온다. 이윽고 어깨가 부딪친다. 덩치 큰 사내 두 명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 하는데 친구가 그들에게 욕을 내뱉는다. 두 남자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안하다’ 말한 뒤 다시 지나가려 하는데 친구가 그들을 붙잡고 가게 두질 않는다. ‘어딜 그냥 가 x끼야’.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때,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하겠는가?
나라면, 그들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친구를 말리겠다. 지금 그들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그들을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명분이 없다, 시비는 우리 측에서 먼저 걸었다’는 것이다. 좁은 길 지나며 어깨 부딪칠 수도 있고, 서로 너그럽게 지나가면 될 일인데 그걸 굳이 싸움으로 키운 것은 내 친구이지 않나.
‘상대방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내 편인 친구를 말렸다’라는 사실만 가지고 ‘배신자, 친구 팔아먹을 놈’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만이 진짜 우정인가. 나는 친구를 말리고 상대에게 미안하다 말하지만, 이것이 친구를 버리고 상대를 위하는 일인 것은 아니다. 친구와 나의 이익을 위한 선택인 것이다. 물론,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다면 이기든 지든 친구와 함께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현재 일본과의 무역 갈등이 한창이다. 그리고, 일본과의 분쟁을 더 이상 키우지 말고 외교적으로 얼른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즉시 ‘토착 왜구’ , ‘친일파’ , ‘아베 대변인’이 된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관심도 없다. 조국 민정수석은 물 만난 듯 페이스북에 글을 쏟아내고 있다. ‘죽창가를 잊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애국이냐, 이적이냐다’. ‘일제 징용 대법원 판결 부정하면 친일파’. ‘문재인 정부는 서희와 이순신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한다. 쫄지 말자’ 등이다. 멋지다. 100년 전에 나왔어야 할 인물이 지금 여기 있다. 문 대통령의 심복이니 아마 대통령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일본 편드는 매국노, 쫄아서 웅크린 겁쟁이로 몰아버린다. 그들의 주특기인 프레임 덮어 씌우기와 낙인찍어 매도해버리기가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듯하다.
조국 수석의 SNS 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죽창가’는 살펴볼 가치도 없다. ‘애국이냐, 이적이냐’. 애초에 정부가 선동하는 대로 반일감정에 동참하지 않으면 이적질이라고 몰아붙일 심산으로 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자유대한민국을 지키는 한-미-일 3각 공조를 붕괴시키고 주적인 북한을 이롭게 하고 있으니 조국 수석이야말로 이적질의 선봉에 서 있다. ‘대법원 판결 부정하면 친일파’. 우리나라가 독재국가가 다 되었다. 어떻게든 반대 세력들을 친일파의 프레임에 덮어 씌우고 국민을 분열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국내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외국과의 외교 분쟁에서 우리 대법원의 판결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일본이 그들 대법원에서 자기들끼리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 결론 내리고 해상자위대 전함으로 독도를 포위하면 그것도 대법원 판결이니 존중해야 하나? 아니라면, 일본은 왜 우리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야 하나? ‘서희와 이순신 역할’. 서희는 전쟁 중인 적장을 만나 말로써 담판을 짓고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북한 김정은을 만나 그들의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이끌어 냈다면 현대판 서희로 떠받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우호국과의 해묵은 역사 분쟁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때아닌 반일 감정이나 일으키고 있지 않나. 게다가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까지 들먹이다니. 무능한 임금 선조가 말아먹은 나라를 목숨 걸고 백성들을 규합해 지켜낸 이순신 장군에 알맞은 인물을 지금 굳이 찾자면,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아닌가?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한다’니, 우리나라와 밀접한 경제 공동체로서 함께 발전하고 성장해야 할 이웃 국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시비 붙여놓고 누구보고 싸우라는 소린가. 또 선동질인가.
감정을 비우고 생각해 보자. 이른바 ‘토착 왜구’들은 왜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는가? 그것이 국익에(물론 대한민국의) 부합하기 때문이다. A와 B 두 사람이 이웃인데, A는 산속에서 좋은 나무를 찾아 많이 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B는 마당에 작업대를 펼쳐 놓고 멋진 가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A가 나무를 지어 오고 B가 제품을 만들어 팔아 이익을 나누는 것이 윈윈 아닌가? 현재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그렇다. 소재부터 완제품까지 자력갱생으로 다 해결할 수 있으면 무역은 무엇 하러 하는가? 우리 근처에 ‘자력갱생’을 모토로 문 꽁꽁 걸어 닫고 전전긍긍하는 나라가 하나 있는데 지금 그 꼴이 어떤지 보길 바란다. 그리고, 일본에서 수입해 오던 원자재들의 대체품을 찾으면 되고 자체 개발하면 되고 하는 소리들도 많이 들리는데, 왜 그걸 우리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 발짝 더 나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대체품을 찾고 자체 개발하고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우리가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반도체 산업이 계속 건재하리라 장담할 수 있나? 삼성, SK하이닉스의 반도체를 받아다 쓰던 세계의 다른 기업들도 다른 반도체 대체품을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길게 끌수록 득 될 것이 전혀 없다는 소리다
지금 우리가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을 일본 편드는 소리라 매도하는 사람들은, 이성은 멈추고 감정만 앞선 것이다. 정부가 경제, 외교, 안보를 모두 망치고 추락할 것이 뻔한 지지율을 어떻게든 건져내려고 썩은 동아줄 잡듯 붙잡은 ‘반일감정 일으키기’ 술수에 말려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과 미-일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북한이 일본에 대고 특유의 쌍스러운 욕을 해대니 ‘역시 한민족이다’ 같은 정신 자위나 하고 있다. 그 사이에, 러시아 폭격기는 독도 근처 영공을 침범했고 일본은 자기네 땅인 다케시마에서 대응 비행에 나선 한국 전투기의 출동을 비난했다. 북한-중국-러시아 같은 살벌한 나라들 옆에 살면서 미국-일본 같은 든든하고 강력한 동맹을 저버린 결과다.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 눈치 보느라 무너진 마당에 강력한 국방 동맹마저 저버렸으니 구한말의 상황과 뭐가 다른가?
나는 토착 왜구가 아닌, 진심으로 자유대한민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명의 국민으로서 말한다. 정부는 일본과의 갈등을 외교적으로 하루빨리 매듭지어야 할 테지만 지금 상황에선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일본 불매 운동’ 같은 실속 없는 짓을 당장 중단하고 정부에게 빠른 외교적 해결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무분별한 반일 감정 분출은 결국 우리 정부를 일본과의 대립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하게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이 될 것이다. 감정을 거둬들이고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때다. 사실, 어쩌면 이미 많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