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직원동아리 '어작'의 두번째 책에 쓴 글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하였지만,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결코 책 속에서만 머무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라 불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몰두했던 실학이란 말에서, 그저 편리함이나 효율성만을 떠올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봐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사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젊은 그들의 새로운 학문은 비롯되었으니까요.
- 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중에서
똑. 똑. 똑.
오늘도 잠을 깨운 건 휴대폰의 알람이 아니었다. 몇 달째 안방 화장실의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잠에 빠진 내게 ‘똑똑똑’ 노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샤워기 레버를 제대로 잠그지 않아서 그런지 알았다. 하지만 있는 힘껏 레버를 잠갔는데도 물방울은 계속 떨어졌다. 샤워기 호스를 바꿨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손 헤드 샤워기를 바꿨다. 여전히 같은 증상이 계속 나타났다. 이제 남은 방법은 수전을 통째로 바꾸는 일뿐이다. 하지만 저렴한 수전을 사도 10만 원 정도 하는 데다 설치 기사가 오면 거기에 최소 6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비 그친 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1년 동안 모아 수도 요금을 내도 수전을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기에 아예 생각을 접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늘어나기만 하는 나이, 떨어지기만 하는 체력, 밤까지 이어지는 고온 현상 등 만성피로에 대한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욕실 수전의 누수가 겨우 잠든 나의 새벽을 방해하는 주범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밤새 마르지 않는 샤워실 바닥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곰팡이는 무작정 미루던 게으름에 결정타를 날렸다. 먼저 유튜브를 검색해서 초보자도 가능한 일인지 알아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욕실 수전 교체’라고 검색하니 일반인 중에 먼저 경험한 사람과 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올려놓은 영상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 완전 초보자에 초점을 맞춘 영상을 몇 번 돌려보며 자신감을 키웠다.
곧바로 샤워기 수전을 주문했다. 아내에게는 주문 후에 얘기했다. 먼저 말하면 말릴 게 뻔하니까. 주말에 시간을 내서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상수도의 밸브를 잠그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당연히 주방 싱크대 아래에 있을 거로 생각했던 밸브는 여기저기 살펴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잠가봐도 욕실 수도꼭지를 틀면 여전히 물이 쏟아졌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물어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한 번 더 찾아보고 못 찾으면 전화하기로 했다. 현관 밖에 동파 방지를 위해 어느 해인가 솜으로 똘똘 말아놓은 밸브를 찾아 잠갔다. 그랬더니 욕실에서 더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욕실뿐만 아니라 집 전체에 물이 나오지 않아 가족들도 수전 교체가 끝나야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서둘러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기존 수전을 해체하는 일이 두 번째 단계였다. 둘째 아들이 애용하던 해바라기 샤워기는 입주 초기부터 문제가 있었다. 사용하고 나면 헤드에 물이 남아있다가 다음 사람이 샤워하러 들어가면 왈칵 찬물을 쏟아내 무척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둘째 아들을 설득해 해바라기 샤워기는 그 뒤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년째 개점휴업 상태인 해바라기 헤드와 수전을 연결하는 기역자 파이프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해체하려고 보니 벽에 고정된 일자 파이프의 스테인리스 도장이 벗겨져 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렇게 불결한 상태였는데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해체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에 있던 멍키스패너가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새 수전을 가져와 그 자리에 설치만 하면 되었다. 내가 본 영상들은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전을 교체하는 것으로 끝이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새 수전을 설치하려고 하니 기존 것과 모델이 달라서 바로 연결이 안 되었다. 입주할 때부터 있던 수전은 이미 단종되고 없어서 최대한 비슷한 것을 찾아 주문했더니 전혀 다른 공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결국 초보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다음 단계의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영상 속 전문가는 여기서 결정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괜히 비전문가가 손을 댔다가 나중에 더 큰돈이 들어갈 수 있다며 겁을 주었다. 하지만 30분 넘게 볼일을 못 보고 있는 큰아들을 생각하니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초보자가 건드리면 안 되는 단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풀고 조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마침내 새 수전이 설치되었다. 이번에는 해바라기 헤드를 수전에 연결하는 일이었다. 영상 속에서는 기역자 파이프를 잡아주는 벽 지지대를 전동 드릴로 구멍을 뚫고 칼블럭을 박은 뒤에 1분도 안 걸리는 쉬운 작업처럼 담겨 있었다. 이 부분은 기존 벽 지지대를 재활용할 생각이어서 처음부터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제품이 다르니 벽 지지대의 위치도 달랐다. 해바라기 헤드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시멘트 욕실 벽에 두 개의 구멍을 새롭게 뚫어야 했다. 이 공정은 전동 드릴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전동 드릴 같은 전문가가 쓰는 공구는 없다. 어찌어찌 기존 구멍을 활용해서 해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1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더는 “조금만 참아”라고 말하는 게 무색할 정도였다.
급히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말하고 전동 드릴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 전화 통화 속에 ‘혹시 이 작업을 와서 해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바람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관리사무소 직원은 “드릴을 빌려드릴 테니 관리사무소로 오라”는 말로 일말의 희망도 못 품게 했다. 간단히 사용법을 배우고 가져온 전동 드릴로 타일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타일이 깨져버릴 수 있으니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해야 해요.”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을 떠올리며 어린아이 달래듯 조심스럽게 드릴을 타일 위에 얹었다. 그런데 너무 조심스러웠는지 타일에 구멍은 뚫리지 않고 전동 드릴 소리만 요란하게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그거 꼭 뚫어야 해?”
어느새 왔는지 아내가 뒤에서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기존 구멍하고 안 맞네.”“같은 제품 산 거 아니었어?”
“응. 그 제품은 벌써 단종됐지. 우리가 입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전동 드릴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남편이 미덥지 못했겠지만, 아내는 더는 묻지 않고 자리를 떴다. 타일엔 천공 미수의 흔적들이 눈가에 생긴 주름처럼 한 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 있었다. 타일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다시 전동 드릴의 트리거를 당겼다. 그러자 회색 가루를 뿜으며 타일에 조그맣게 홈이 파이기 시작하더니 드릴이 점점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처음 구멍이 뚫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 막상 작은 구멍이 생긴 뒤로는 칼블럭을 심을 위치까지 뚫고 들어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타일의 손상 없이 첫 번째 구멍이 뚫렸다. 미리 표시해 둔 곳에 두 번째 구멍을 뚫었다. 앞선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처음부터 힘을 주어 작업을 했더니 훨씬 이른 시간에 원하는 위치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욕실 벽과 바닥에 흩뿌려진 회색빛 자부심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천공 작업을 마치고 해바라기 수전을 설치한 뒤에 다시 상수도 밸브를 열어서 테스트하는 데까지 약 2시간 정도 소요가 된 듯하다.
“이제 화장실 써도 됩니다.”
아빠의 의기양양함에 가족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들은 급한 볼일을 보러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고, 아내는 미뤄둔 설거지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났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인가.
입대해서 첫 번째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동안 트리 장식에 사용했던 줄 전구들을 확인해서 불이 안 들어오는 것은 잘라내 버리고 들어오는 것들로만 연결하라는 선임병의 지시가 떨어졌다. 주어진 상자에 담긴 전선은 마구잡이로 엉켜 있어서 우선 그것을 하나하나 푸는 일부터 시작했다. 한참 만에 전선 가닥을 신병교육대 조교로서 제식 훈련 시키듯 4열 종대 열을 맞춰 줄을 세울 수 있었다. 하나씩 전원에 연결해서 안 들어오는 것은 버리고, 들어오는 것을 다시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전선을 자르고 연결하는 일이 다음 차례였다. 겨우 그 작업을 마치고 점호 시간에 점등식을 했다.
“이거 누가 작업했지?”
당직사관이 점호 보고를 하기 위해 내무반 앞에 서 있던 분대장에게 물었다. 분대장이 대답하기 전에 손을 들었다.
“제가 했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나와서 전원 연결해.”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뛰어나와 트리를 감고 있던 전선의 플러그를 콘센트에 연결했다. 그 순간 ‘푸지직 파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트리 주변으로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다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다행히 전선에서 일어난 스파크가 트리로 옮겨붙지는 않았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쓸 틈도 없이 그렇게 상황은 종료됐다. 그때 불이 났으면 아마 내 인생도 함께 종료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날 이후로 이런 작업에 내 이름은 절대 불리지 않았다.
대학 4학년 때 IMF가 터졌다. 교직은 내게 맞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복학 후부터 일반 기업체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했던 내 꿈도 IMF 금융위기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졸업하기 전에 들어갔던 직장에서 인턴의 자리는 정리 대상 0순위였다. 그렇게 쫓겨나자 갈 곳이 없었다. 대학 때 자취하던 살림을 정리해 형이 있는 부천으로 가서 더부살이하며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언젠가 자동차 정비 기술을 써먹을 기회가 찾아올 것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공구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으니 카센터에서 만나는 공구들은 이름부터가 무척 생소했다. 형이 작업 중 가져다 달라는 공구를 바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두 달 정도가 흘렀을 때쯤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전조등(헤드라이트)이 고장이 나서 들어온 차를 정비해 보라고 했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봐왔던 것이 있어서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고장 난 전조등을 통째로 빼고 새 전조등을 그 자리에 끼워주면 되는 것으로 형광등을 교체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를 맡긴 연세 지긋한 부부도 빠른 일 처리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그 노부부가 다시 찾아왔다.
“아니. 왜 헤드라이트가 불이 안 들어와요? 어젯밤에 차 끌고 나갔다가 죽는 줄 알았다니까.”
“사장님, 불이 안 들어온다고요?”
운전석에 앉아 전조등을 작동시켜봤더니 진짜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형이 두 분을 달래 사무실로 안내하고는 다시 돌아와 전조등을 살펴보더니 내게 물었다.
“너 전구 안 끼웠어?”
“그거 전구까지 같이 들어있는 일체형 아니었어요?”
전조등을 차에서 분리해 전구를 연결하고 불이 들어오는지 테스트를 거친 후 여러 번 사과하며 노부부를 돌려보낸 뒤에 형이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너는 이쪽 일이 안 맞는 거 같다.”
뚝. 뚝. 뚝.
자고 일어났는데도 새로 설치한 욕실 수전에서 여전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존에는 샤워기 헤드에서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편심(벽 속 수도관과 수전을 연결하는 부위) 쪽에서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지고 있었다. 이 편심은 전문 영역이니 절대 건들지 말라는 게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데 새로 주문한 수전이 기존 제품과 달라 도저히 안 건들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서 말썽이 생긴 것 같았다.
다행히 가족들이 모두 자고 있어서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다시 밖으로 나가 집으로 들어오는 상수도 밸브를 잠그고 수전을 설치 역순으로 하나하나 해체했다. 다 뜯고 나서 보니 이유를 대충 알 거 같았다. 편심에 테플론 테이프(누수방지를 위해 사용하는 하얀색의 아주 얇은 테이프)를 10회에서 15회 정도 둘러 감으라고 했는데 5번 정도만 감아서 생긴 문제로 보였다. 영상 속 전문가는 테이프를 쉽게 돌돌 감았는데 완전 초보자인 나는 테이프를 바닥에 몇 번이나 떨어뜨리며 겨우 다섯 번 감고 말았는데 그게 문제였다. 기존 테이프를 제거하고 영상 속에서 말한 것처럼 10번 이상 테이프를 편심에 둘렀다. 해체의 역순으로 다시 결합한 뒤 수도관 밸브를 열어 확인했는데 더는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수전을 교체하고 보름 정도가 지났다. 둘째 아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그동안 못 썼던 해바라기 수전을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욕실 바닥은 아침에 들어가면 물기 하나 없이 뽀송뽀송함을 유지하고 있다. 스테인리스 수전은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반짝하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고, 몇 년 치 수도 요금에 해당하는 돈이 들어갔지만, 낙숫물 알람으로 인해 원치 않던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 더는 발생하지 않는다. 어제는 세미나실에서 책상 상판을 바꾸고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순회하다가 잠시 들렀다.
“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칼에 베이고 뚫리고 모서리가 깨진 책상 상판을 교체하는 일은 사실 전동 드라이버 하나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놀랄 일도 아닌데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뭔가 대단한 일처럼 보이나 보다.
누수가 있는 수전을 교체하는 일, 자전거의 펑크를 때우는 일, 높낮이가 다른 교실 책걸상의 높이를 조절하는 일 등 전문가가 보기에는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일일지라도 책만 보던 바보에겐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불편함, 관습에 젖어 바꾸려 하지 않는 시스템 등 뭔가 마음에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쉽게 넘기기 힘들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책만 보던 바보가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것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중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제 한 번 고쳐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