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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Aug 01. 2024

아침고요산책

우리 집에서부터 학교까지는 걸어서 약 5분, 빠르게 걷는다고 하면 약 3분 정도가 걸린다. 그렇다면, 내가 늦지 않기 위해서는 빠르게 걸어야 한다.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뛰는 건 안 된다. 힘들어서 오히려 더 느려질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쪼개본다. 5분까지 초등학교 정문, 6분까지 폭포 앞, 적어도 8분에는 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핸드폰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걷는다. 날파리들이 자꾸 얼굴에 부딪히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7분, 8분, 9분…. 9분에 정문을 통과했다. 지각이 코앞이다. 힘들지만 지금부터 뛰어야 한다. 이제는 시계를 초 단위까지 확인하며 뛰어간다. (중략) 신발을 갈아 신는 시간은 매번 기록을 경신한다. 오랜 지각으로 다져진 스킬로 신발을 빠르게 갈아 신고 계단으로 뛰어간다. 두 칸씩 뛰어서 올라가면 4층은 금방이다. 다리가 아프지만, 계단을 올라가서도 뛰어야 한다. 5초 안에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면 지각이다. 5...4...3...2. 2초 남았을 때 교실에 들어왔다.

                                                                                                                - B, ‘아침지각과의 사투’ 중에서 -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어느새 자기 자리가 정해져 버렸다. 늘 10분 정도 일찍 와서 자리를 선점하는 O는 맨 뒤 창가 자리를 고수한다. 거의 8시 정각에 오는 K는 O보다 두 칸 앞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짝꿍 G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하나둘 아이들의 출석부는 8시 10분을 조금 넘어서야 자신들이 입실한 시간으로 채워진다. 출석부 옆에는 한 달 전부터 자전 빈 갑이 16개 담긴 바구니를 가져다 놓았다. 그 빈 갑에 휴대전화를 자율적으로 넣기로 했다. 아니 넣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어제는 4대, 오늘은 3대만이 주인의 손을 떠나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3대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가 너무 욕심이 과했나?’ 싶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을 가리고 있는 칼라박스 너머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이달의 주제 도서 ‘여름 한 입을 베어 물었더니’를 읽는 아이,

주제 도서를 다 읽고 다른 책을 꺼내 읽는 아이,

책상 가득 펼쳐놓고 학원에서 내준 과제를 하는 아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만 들락날락하는 아이,

휴대전화와 교재를 번갈아 보며 무엇인가를 적는 아이,

아침에 받은 간식을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까먹는 아이.     


‘아침고요산책’은 ‘아침에 고요한 곳에 모여서 뜻하게 책을 읽고 나누는 학생 자율 동아리’다. 일찍 일어나 움직여야 하루가 개운한 ‘아침형 인간’인 내가 의미 있는 아침 시간을 갖고자 아이들의 신청을 받아 올해 처음 만들었다. 학교에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매일 아침 8시부터 8시 40분까지 한문교과실에 모여서 활동한다.


주된 활동은 학생들이 추천한 책 중에서 매달 주제 도서를 정하여 같이 읽고 나누는 것이다. 첫 달인 4월은 일본 작가 산다 치에의 소설 ‘해피엔딩에서 너를 기다릴게’를 읽었다. 처음엔 소설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나눌 것을 생각하니 헷갈리는 게 한둘이 아니어서 세 번을 다시 읽게 되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나 책도 두 번 다시 안 보는 편인데 두 번째 읽으니 처음에 가볍게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던 내용 중에 작가의 의도가 담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 읽을 때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상황이 명확하게 그려지기까지 했다. 함께 나눌 때 “두 번 읽었더니 비로소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상황이 이해되었다”라고 말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아침고요산책’이 아니었다면 절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볼 일도 없었을 것이며, 이렇게 깊이 이해해서 나누지도 못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신청하면 교육지원청에서 작가를 섭외해 주는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은유 작가가 5월에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5월의 주제 도서로 정해 읽었다. 책은 ‘글쓰기’를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고민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중학생들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었다. 5월 주제 도서에 맞게 책을 읽고 나누는 것 외에 글쓰기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동아리원 중에 평소 글쓰기가 취미인 아이도 있지만, 논술평가를 제외하고는 글쓰기를 거의 해보지 않았다는 아이도 있어서 많이 부담스러워하기는 했다. 하지만, 글을 써 보면 그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작가에게 직접 질문을 해서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며 설득했다. 주제는 동아리의 성격에 맞게 ‘아침’으로 정했다. 제출한 글 중엔 소설형식으로 가상의 나를 내세워 쓴 것도 있었지만, 올해 아침고요산책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면서 느낀 부분을 적은 글도 꽤 있었다. 이 글 처음에 나오는 ‘아침, 지각과의 사투’도 동아리원인 B가 그때 쓴 글이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나면,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둥그렇게 앉아 8시부터 8시 50분까지 함께 나누기한다. 하지만, 그전에 제대로 나누기 위해 3가지 과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첫째는 책을 읽고 함께 나눌 질문을 1개씩 뽑아내는 것, 둘째는 그렇게 모인 질문 중에서 함께 나눌 질문 3개를 선정하는 것(이것은 온라인 투표를 통해 진행한다), 끝으로, 그렇게 선정된 질문 3가지에 대해 각자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적어 제출하는 것이다. 


한 곳에 모여 책만 읽는 것으로 생각하고 왔던 아이 중에 2명은 이 과정을 힘들어하며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유로 자의 반 타의 반 참여하게 된 아이 2명도 엄마의 잔소리보다 더 무서운 잠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침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겠다며 야심 차게 출발한 16명 중 4명이 이래저래 그만두고 지금은 12명이 함께 하고 있다.


6월의 주제 도서는 4월 주제 도서만큼 곱씹어 읽을 정도는 아니어서 금세 읽어버렸다. 나누기 전까지 읽을 다른 책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 윤성희의 ‘목요일의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책을 읽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게 되어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우리는 지필평가가 끝나고 돌아오는 첫 번째 토요일(7월 13일)에 서울에 있는 대형서점에 가려고 한다. ‘서점이라는 문화를 접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책과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라는 구절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아 추진하게 됐다. 책이 필요하면 인터넷으로 사서 보고, 그게 안 되면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게 익숙한 아이들에게 대형서점에 가서 본인이 원하는 책을 직접 고르게 하고, 동아리 예산에서 일정액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더불어 서점 근처 명소를 찾아 서울 나들이도 겸하려고 한다. 물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있는 메뉴로 점심을 먹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이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언뜻 생각해도 몇 가지 번거로운 절차들이 있다. 우선 관리자의 허락도 구해야 하고, 계획서 만들어 내부 결재도 받아야 한다. 또, 가정통신문을 보내서 학부모의 동의를 구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모처럼 하게 되는 서울 나들이에 부푼 아이들의 바람과 사비라도 털고 싶은 빠듯한 예산의 현실 앞에서 적절한 지출 계획도 세워야 한다. 이번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머리 아픈 일들을 감수해야겠지만 그날의 계획을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무척 행복하다. 


사탕, 초콜릿, 과자, 양갱, 쿠키, 소시지 등 평소 간식을 즐겨하지 않는 내가 최근에 산 품목들이다. 정해진 간식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저렴하면서도 양이 많은 것을 찾고 있으나 호주머니 사정이 뻔한 동아리 담당 교사로서 가파르게 오르는 물가 인상을 따라가기에는 숨이 가쁘다. 기왕이면 아이들에게 매일 다양한 간식을 먹여주고 싶은데 말이다. 그렇지만 잠과 사투하며 아침고요산책을 찾아오는 12명의 전사를 위해 오늘도 집에 가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러보려 한다.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는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책에 푹 빠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세상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고귀하다. 이 아이들과 아침을 같이 보내고 나면 에너지가 자동으로 충전되는 느낌이다. 이런 고마운 아이들을 위해서 오늘도 1시간 일찍 출근해 한문교과실의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아이들의 숫자에 맞게 간식을 준비한다. 

동아리원인 N이 '아침고요산책'을 생각하며 적은 글로 동아리의 소개를 (빙자한 자랑을) 갈음하고자 한다.


하고 싶었던, 또 해야 했던 아침 습관 바꾸기는 물론이며, 독서와 소통이라는 선물까지 가져다준 아침고요산책은 나의 낙원과 같은 것이고 나는 오늘도 낙원을 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N, ‘변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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