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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Sep 13. 2024

등록금을 못 냈어요

샤워를 마친 큰아들이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을 엄마에게 들었는지 곧바로 카톡을 보내왔다.

‘어떡해? 나 학교 못 가는 거야?’     


20년 넘게 만나고 있는 고3 담임들 모임이 끝나갈 즘이었다. 오륙십 대 모임이다 보니 건강에 관한 얘기를 주로 하게 된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퇴직 후의 삶에 관한 얘기로 대부분 흘러갔었는데 그날따라 자녀들 얘기가 어딘가에서 툭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집에서 여름방학을 맞이해 신생아처럼 먹고 자기를 반복하며 여름잠을 잔다는 북극곰처럼 포동포동 살이 오른 큰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옆에 두 아이를 이미 대학에 보낸 친구에게 물었다. 

“2학기 등록금 고지서 별도로 나오는 거 맞지?”

“응. 아직 안 냈어?”

“아무 말이 없던데.”

“진짜? 이미 지났을걸. 혹시 장학금 받은 거 아냐? 아니면 부모 몰래 자퇴하려고 그러나?”

장학금은 남의 집 아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고, 자퇴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 모임 나오기 전에 큰아들 방을 보니 내일 기숙사에 가지고 가려고 벌써 이것저것 다 쑤셔 넣어 빵빵하게 채워놓은 가방을 대여섯 개나 보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다시 아내에게 전화해 등록금 납부에 관해 물어보니 아내 역시 금시초문이라며 당황한다. 씻고 있는 큰아들이 나오면 물어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큰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다니는 학교의 등록금 납부 기간을 검색했다. 아뿔싸. 2학기 등록금 납부 기간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하소연이라도 해서 어떻게 해보려 해도 마감 시간마저 4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잠시 후에 큰아들로부터 문자가 왔다.

‘어떡해? 나 학교 못 가는 거야?’

 그렇게 큰아들은 대학교 1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겸해 마신 술기운까지 올라와 곧 심장이 터져버릴 거 같았지만 마음을 억누르며 큰아들과 유사한 사례는 없는지 찾아봤다. 포털사이트에‘**대 추가등록 기간’으로 검색하니 비슷한 경험을 한 학부모들의 글이 여럿 있었다. 특히 1학년 2학기가 유독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있으면 스쿨뱅킹에서 저절로 빠져나갔기에 부모도 자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납부 기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등록금을 내라는 전화나 문자메시지마저도 없어 학교 홈페이지에 찾아 들어가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비롯해 사정이 있어 정해진 기간에 납부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일정 기간 ‘추가등록 기간’을 둔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도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등록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급히 모임을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큰아들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면 그 정도는 스스로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속없이 방학 동안 컴퓨터 게임만 하고 탱자탱자 놀던 모습이 떠올라 이번 일을 계기로 단단히 마음을 다잡게 해주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큰아들 얼굴을 보면 무슨 말부터 쏟아부어 줄까? 지하철을 타고 가는 1시간여 동안 다양한 레퍼토리의 독설을 준비했다. 


나는 주어진 일(과제)이 있으면 늘 서둘러하다가 실수해서 후회하는 편이고, 아내는 미루고 미루다 때를 놓쳐 기회를 잃거나 금전적인 손해를 가져오는 편이다. 아이들이 이용하는 미용실 예약을 미루다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못 하게 되는 경우, 세금이나 공과금을 내야 하는데 미루다 연체가 되어 가산세를 내야 하는 경우 등등. 머리를 복잡하게 써야만 하는 과제이거나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면 이해가 되나 큰 어려움 없이 금방 해낼 수 있는 것마저도 미루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마음 편히 있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그렇게 미루다 보면 잊어버려서 날짜를 놓치거나 기회를 잃게 되는 경우도 많고, 미루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은가. 늘 이런 불만이 있었는데 이번 큰아들의 등록금 미납은 평소처럼 미루다 못 낸 것은 아니지만, 평소 아내를 닮은 기질부터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바꾸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완벽한 시나리오를 작성해 집에 도착했는데 거실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서 있는 어두운 표정의 큰아들을 보니 하고 싶었던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본인도 얼마나 놀랐을까. 큰아들도 대학이 처음이고, 그동안 등록금을 직접 내본 적이 없었으니 본인이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으면 몰랐겠지.

그래도 추가등록 기간에 납부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번 일로 우리 부부도 큰아들도 큰 배움이 있었다.

‘큰아들, 앞으로는 서로 잘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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