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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Aug 05. 2024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비아리츠(Biarritz)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는 나를 태우지 않고 떠나버렸다. 탑승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니었다. 항공권을 잘못 발권한 것도 아니었다. 구글 번역기를 통해 항공사 관계자한테 들은 대답은 “비행기의 좌석이 고장 나 손님을 태울 수 없습니다.”였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가는 첫 여정부터 삐걱거렸다. 하지만 그 삐걱거림은 두 번째 순례길에서 마주했던 당황스러운 여러 가지 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헝가리 친구의 집으로 가기 위해 산티아고 공항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앞두고 있었다. 연결통로 건너편에 우리를 태우고 갈 이베리아(Iberia) 항공사의 비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항공권을 확인하던 항공사 관계자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내 배낭을 가리키며 나무라듯 무슨 말을 했다. 하지만 내 귀엔 “Too big.”만 매우 크게 들렸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한 몸처럼 지니고 다녔던 배낭인데 너무 커서 비행기에 가지고 탈 수 없다고 했다. 그녀의 완강한 태도는 ‘즉시 수화물로 부치지 않으면 비행기에 태우지 않겠다’라는 의미로 느껴졌다. 결국 배낭은 항공사 관계자에 의해 수화물 칸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마드리드로 가는 동안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경치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유지인 마드리드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에 배낭이 제대로 옮겨질 수 있을까. 마드리드에 도착할 때까지 그 불안함은 이동 거리의 몇 배로 부풀어 올랐다. 번역기에 구구절절 내용을 적어 마드리드 공항에서 근무하는 항공사 직원에게 보여줬다. 직원은 여권과 항공권을 확인하고는 컴퓨터와 전화로 알아보더니 “배낭은 예정대로 부다페스트에서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내 배낭은 그날 부다페스트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다.


여행하다 보면 늘 뜻대로, 예정대로만 되지 않으니 이런 해프닝이 매우 낯선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의 여행은 이런 당황스러운 일들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헝가리 친구와 한 달여 걸었던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쓴 일기에 같은 소재의 글이 단 한 번도 올라온 적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놀라운 일들로 넘쳐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왜 다시 찾게 되었을까.


작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병이 나거나 큰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연료가 다 떨어진 자동차가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다 도로 중간에 멈춰버린 것처럼 갑자기 세상 한가운데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몸도 예전처럼 활기가 돋지 않고 마치 장대비에 푹 젖은 옷처럼 몹시 무거웠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지인들과 모임을 하고, 근교에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아지기보다는 깊은 늪에 점점 빠져드는 것처럼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먼저 수년 전부터 주도했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연구회에 나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단체 대화방에서도 조용히 나와 버렸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학교에서도 주어진 업무만 겨우겨우 해낼 뿐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거나 그동안 해오던 사업을 발전시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나는 쪼그라들었다. 해가 바뀌어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면 좀 낫지 않을까. 그런데 하늘은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듯 창가를 때리는 비를 연신 쏟아내고 있었다. 유난히 긴 장마로 인해 온 나라가 축축해졌고, 마음속까지 곰팡이가 슬어 퀴퀴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름, 가을, 겨울이 오기까지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때, 마치 신의 계시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이 나를 불렀다. 


2018년에 ‘전문연구년’으로 선발되어 전에 없던 여유가 생기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信者)가 아니기에 ‘순례길’의 의미보다는 걷기 여행을 한다는 마음으로 900km 정도를 걸었다. 그런데 다녀온 뒤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 유튜브로 다른 사람이 걷는 것을 보거나 순례길 다녀온 사람이 쓴 책을 사서 읽기도 했지만, 오히려 ‘산티아고 앓이’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 대부분이 걸리는 '산티아고 앓이'에 나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길이 나를 부르니 방법이 없었다. 까미노에서 맡았던 바람의 향기, 종일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깔깔 웃고 울던 기억, 수많은 감정과 함께 내 안의 나를 마주했던 순간들이 사무쳐왔다. 다시 떠나야 했다.

- 박재희의《산티아고 어게인》중에서 -     


남은 교직 인생에서 전문연구년처럼 시간이 날 일은 다시 없었기에 ‘언젠가 다시 그 길 위에 서고 싶다’라는 바람만 지닌 채 산티아고를 향해 요동치는 파도를 잠재우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학교의 석면 공사로 긴 겨울방학이 주어졌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 부름에 응답하면 조금 나아질까 싶었다. “2018년에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산티아고 보내준 거야.”라고 평소에 말하던 아내였기에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도 쉽게 허락해 주었다. 


곧바로 헝가리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 일주일 정도 같이 걸었었다. 첫 번째 순례길을 마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기회가 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걷자’라며 기약 없는 얘기를 나누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일찍 그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회사에 장기휴가를 내고 내 일정에 맞춰 중간 지점에 합류했다. 그렇게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되었고, 힘들었던 작년을 무사히 버텨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은 숨이 멎어가던 나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심폐소생술이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많은 사람을 잃었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학교에서 오는 연락을 무시했다. 부장 보직을 계속 맡아달라는 교장 선생님의 부탁도 거절했다. 그러다 보니 평교사 때부터 15년 넘게 유지해 온 각별한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는데 교장 선생님은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못 본 체하며 서운함을 진하게 드러냈다. 그 이후에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기는 너무 멀리 와 버린 느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내게 왜 이런 순간이 찾아온 것일까?’. 걷는 동안은 끝내 답을 찾지 못했는데 최근에야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번 아웃’. 50년 넘게 사는 동안, 어느 해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학창 시절에 공부를 아주 잘한 것도 아니고, 교사가 되어 엄청나게 인정받은 것도 아니지만, 늘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라는 인생관으로 살아왔다. 그동안 열심히 달렸으니 잠시 쉬어가라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라며 작년 같은 상황이 찾아온 게 아닐까. 


요즘은 ‘100세 인생’이라고 한다. 나는 이제 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반환점에서 정말 당황스러웠던 작년의 나를 돌아보니 어쩌면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 탈피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모처럼 2학년 담임을 하면서 아이들로부터 새로운 기운을 얻고 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마구 샘솟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마지막 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부릉부릉. 

종례를 받기 위해 담임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향해 다시 시동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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