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미노 Jul 31. 2024

나는 무엇에 발작하는가

'선생님 자리에 안 계셔서 이 제자 커피만 두고 사라집니다.’

학년부 회의를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면서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Y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10여 년 전 담임했던 반의 아이다. 군대도 이미 다녀왔을 나이니 ‘아이’라고 부르기에 적절하지는 않지만, 다시 10년이 지난 후에 떠올려도 Y는 여전히 내게 ‘아이’다. 그 사이 휴대전화를 몇 번 바꾸어서 Y의 메시지는 대화창의 맨 위에 자리하고 있어 몇 년만의 연락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담임이 교체되면서 약 100일 정도만 만났던 아이들. 그 아이 중에 Y가 있었다. Y가 보낸 메시지를 보는 순간 감자를 수확할 때처럼 여러 아이가 주렁주렁 딸려 나왔다. 특히 K의 소식이 궁금해 Y에게 다시 학교로 와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고1 신체검사 때 잰 내 키는 161.8cm였다. 그러니 중학교 3학년 때는 이보다 작았을 것이다. 마치 동물의 왕국처럼 힘과 깡다구로 서열이 매겨지는 남자중학교에서 나는 일진들의 먹잇감이자 장난감 중 하나였다. 어느 날은 (11살 많은) 형이 사준 보조 가방을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일진 녀석이 볼펜으로 마구 낙서해놓았다. 형이 사준 선물이기에 들키지 않기 위해 없는 용돈을 다 털어 시장에서 최대한 비슷한 걸로 산 적도 있었다. 월요일만 되면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여학생과 밤새 술 먹고 놀다가 친구 집에서 돌아가며 성관계한 얘기를 마치 무용담처럼 쏟아내는 녀석들도 같은 반에 있었다. 나만 보면 샌드백 때리듯 손과 발로 연타를 날리는 녀석도 그 무리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일진들은 어른 조폭들과 연계가 되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어설프게 건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집단 린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감히 저항도 신고도 하지 못했다.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낸 탓인지 교직에 나와 힘센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신규 발령 받은 학교에선 일진 우두머리 아이가 마치 엄석대처럼 구는 것을 보고는 교무실로 불러다 엉덩이를 수십 대 때린 적도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부장을 하며 학폭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하여 다 끝까지 밝혀 엄중한 조치가 내려지도록 했다. 학폭에 대해서만은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학창 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울분을 힘 약한 아이들이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절 만난 K를 대할 때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출근하니 교장실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중3 담임 교사 중 한 명이 “도저히 담임을 할 수 없다”라며 담임 보직을 내놓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관리자와 몇몇 부장이 모여 긴급회의를 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3학년 교과수업도 없는 나도 참석하게 되었다. 회의의 결과는 담임이 원하는 대로 교체를 해주되 학기 중이라 교과 수업은 그대로 들어가는 것으로 했다. 정작 중요한 대체 담임에 대한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당시 우리 학교는 전국적으로 학교혁신의 선두에 있다고 대외적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물론 그 주된 이유가 배움의 공동체 수업 때문이었지만, 수업을 바꾸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갈등과 불협화음을 학교 구성원이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며 슬기롭게 해결하는 과정 또한 주목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에서 버스를 대절해 참관 오는 교육관계자가 일주일에 수십 명씩 되었다. 그런 학교에서 이런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의 일부는 학교혁신의 업무를 맡고 있는 혁신부장에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반 부담임도 아니고 3학년 교과수업도 없지만 왠지 나서야겠다는 책무성이 솟았다. 게다가 그 아이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작년에 가르쳤던 내가 맡는 게 반 아이들에게도 학교 처지에서도 나을 거로 생각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100일짜리 중3 담임이 되었다.


담임이 바뀔 거라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조회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에서 담임 교체를 불러온 가장 주된 두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조회가 끝날 즈음, 뒷문으로 K가 껄렁껄렁 들어왔다. 분명 담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인사도 없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작년에도 그리 모범적인 아이는 아니었으나 올해 강제 전학으로 온 S를 만나면서 더 심해졌다고 3학년 부장은 귀띔해주었다. S는 조회가 끝날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자기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간다고 했다. 


K는 체격이 크고 깡다구가 있어서 아이들 사이에서 ‘일진’으로 불렸다. K는 반 남자아이들 몇을 지속해 괴롭히고 있었는데 특히 H에게 심하게 굴었다. 이런 사실을 파악해서 지도하면, 교사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쉬는 시간에는 피해 아이들을 따로 불러 살벌하게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안 K가 종례 때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왜 내가 학폭에 가야 하냐?”며 달려들었다. 처음엔 복도에 나가서 기다리면 얘기해 주겠다며 타일렀으나 난동을 멈추지 않아 내가 K의 멱살을 잡아 교실 밖으로 끌어냈다. 이거 놓으라며 팔을 뿌리치던 K는 욕을 마구 쏟아내더니 그대로 학교 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이런 사실을 전화로 K의 어머니께 알렸다. 다행히 K의 어머니와는 관계가 나쁘지 않아 이해해 주셨다. 전에 학생부장을 하면서 K의 형이 일으킨 학폭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면서 생긴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가을 찬바람이 옷소매로 파고들어 마음도 몸도 서늘하던 그 무렵 단걸음에 학교로 찾아와 따졌다.


“선생님께서 애 멱살을 잡고 교실 밖으로 끌어내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건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흥분한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반 아이들 다 있는 교실에서 담임 교사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대드는 K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조용히 교실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나와 저도 순간 욱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K 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동안 담임 교사의 부적절한 대처를 문제 삼아 어떻게든지 자식이 강제 전학을 가는 것은 면해보려는 심사가 엿보였다.


“아버님, 제가 K를 다른 학교로 절대 안 보낼 겁니다. 저도 내년에 이 학교를 떠날 예정인데요. 제가 반드시 K를 우리 학교에서 졸업시키고 옮길 테니 저를 한 번만 믿고 맡겨 주십시오.”


며칠 후 열린 학폭위에서는 당연히 K를 강제 전학 보내야 한다는 얘기가 중론이었으나 현재 강제 전학으로 와서 반 분위기를 흩트려놓고, 온갖 잘못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S의 사례를 들어 강제 전학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담임으로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피해 학생의 부모와 학교 관리자를 설득하고 피해 학생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선에서 강제 전학 대신 강화도에 있는 대안학교로 한 달간 위탁교육 보내는 것으로 했다. K는 이 조치마저도 쉽게 수긍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설득하여 받아들였다. K가 떠나자 교실엔 사라졌던 아이들의 웃음도 생겨나고, 점점 생기가 돋았다. 함께 교실 분위기를 흐려놓았던 S도 그 기세가 많이 꺾여 큰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결국 두 아이 모두 그 뒤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학교로 다시 온 Y가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는 K의 근황을 얘기하며 덧붙였다.


“요즘 만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자기가 그때는 ‘쓰레기’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심하게 괴롭혔던 H를 다시 만나게 되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말하고 싶다더라고요. 애 많이 변했죠?”


엊그제 급식지도를 하고 있는데 3학년 P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사용한 젓가락 하나를 옆에서 먹고 있던 다른 친구의 식판에 던지고 웃으며 가는 것이었다. P가 좀 전까지 밥 먹던 곳을 보니 젓가락 하나가 약간 휘어진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순간 그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너 뭐 하는 거야?”라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조용히 식탁에 있던 젓가락을 집어 들고 퇴식구로 향하며 P를 불러 세워 젓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네 행동을 다 보고 있으니 앞으로 조심해라’라는 의미를 담아.


여전히 P처럼 힘 약한 아이들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아이들을 보면 순간 발작처럼 분노가 확 치민다.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학창 시절의 쓰라린 기억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라 마음속을 헤집어 놓지만, 이제는 올라오는 감정대로 욱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순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이들의 생활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 후에 내 마음도 편치 않기 때문이다. 많이 늦었지만, 중학교 시절의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K처럼, 지금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심한 모멸감과 씻지 못할 상처로 남는지 P도 하루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제발 그날이 K처럼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오늘도 나는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