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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Mar 31. 2024

매일 저녁 고기 먹게 해 줄게

아내는 싫어했다.

집에서 식물을 키우는 것도, 주말 농장을 분양받아 농사를 짓는 것도.

그런 아내를 세상이 바꿔 놓았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소작농으로 살다가 정작 자신 명의의 논을 오래 지어보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셨다.

그 논을 혼자서 경작하기에는 힘이 부친 (2년째 치매약을 복용하시는) 어머니는 몇 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짓게 하더니 이제는 모두 팔아야겠다며 논살 사람을 찾는다. 그러다 온정신으로 돌아오면 한숨을 내쉬며 이러신다.


"오메, 아무래도 내가 치매 걸렸나 보다."


'절대 막둥이만큼은 농사꾼으로 키우지 않겠다'는 부모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형과 누나가 공장을 다니며 자취하고 있던 부천으로 올려 보내졌다. 당시 전학에 의지라고는 1도 반영되지 않았으니 마치 택배로 부친 짐처럼 올려 보내진 것이다.



그렇게 농사하고는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원한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방학 때 집에 가서 일손을 돕는 정도, 그것도 일머리가 없다며 타박을 받아 겨우겨우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교직에 나와서 뜻하지 않게 '포도밭비닐하우스 1동'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혁신학교의 창의적 교육과정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며 "동네 특산품인 포도농사를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농사를 나보다 더 모르는 분들의 주장에 의해 내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2년 동안 책과 유튜브 동영상을 봐가며 말도 안 되는 포도농사를 거의 유기농으로만 지으며 깨달았다.


'농사꾼으로 평생 살지 않아도 되게 일찍 고향을 떠내 보내주신 부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연을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좀 더 엄밀하게 얘기하면 흙 밟고 지내는 삶이 늘 동경의 대상이 되기는 했다.

아파트를 떠나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꿈,

시간 나면 아스팔트길이 아닌 흙길을 오래도록 걷고 싶은 꿈,

조그맣게 땅을 분양받아 먹거리를 재배해보고 싶은 꿈,

'나는 자연인이다'만큼은 아니어도 나만의 소중한 공간이 있는 숲 속에서 삶을 조용히 반추해 보는 꿈


그게 현실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니 꿈이었을 텐데 그 꿈 중에 하나가 어제 조그맣게 실현이 되었다.

분양받은 공무원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데 마침내 올해 처음으로 '텃밭상자'를 2개 분양받았다. 그동안 아내는 극구 반대했다.


"사 먹는 게 싸!"

"엄마가 가져다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근처에 사시는 처가에서 농사지은 채소들을 수시로 줄 때는 이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장모님도 연로해 농사를 짓기도 힘들고, 집 근처가 개발예정지가 되어 마땅한 땅도 없어 더 이상 싱싱한 채소를 무상으로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채소값에 아내도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신이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


이렇게 아내의 허락을 받고 아파트 한쪽에 흙이 담긴 플라스틱 2개 상자에 상추와 치커리, 청경채 등으로 추정되는 모종을 어제 심었다. 다른 이유로 동네 쇼핑몰에 갔다가 우연히 꽃집 앞에 놓인 모종을 발견했다. 굳이 한 판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는데 같은 종류의 모종이 판에 가득 담긴 게 아니라 두 줄씩 다른 모종이 가지런하게 줄 지어 심어져 있어 14,000원을 주고 한 판을 사 오게 됐다. 기왕이면 이것저것 심어서 먹어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판매하는 꽃집 사장님은 어떤 이름을 지닌 모종들인지 몰라 어린 생김새를 보고 얕은 지식을 지닌 내가 그냥 추정만 할 뿐이다.

이거는 청상추, 이거는 치커리, 이거는 청경채, 이거는 치마상추.....


모종을 두 판에 나눠 심고도 여전히 많이 남은 모종을 다시 집으로 가져오며 아내가 말했다.


"우리 저녁마다 고기 구워 먹는 거야?"

"그렇지. 내가 매일 저녁 고기 먹게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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