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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Nov 18. 2024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20년을 넘게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자꾸만 그에게 눈이 간다. 며칠 전 퇴근길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 동안 그를 만났다. 저녁밥을 함께 먹으려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미 나는 그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아버지의 수명을 10년은 줄게 만든 담배보다, 인생의 막장을 보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다시 뛰어드는 도박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덜하지 않을 거 같다. 이런 마음을 누군가는 ‘집착’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으면서도 딱히 반박할 말을 못 찾았는데 엊그제 영화를 보다가 마음에 딱 맞는 대사를 만났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재희」 중에서     


언제부터였을까? 딱히 일자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국민학교 3학년 때였던 거 같다. 그새 수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기억의 왜곡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트레드가 마모 한계선을 넘어 반들반들해진 타이어를 장착한 채 블랙아이스가 가득한 새벽길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그를 향한 마음은 제동장치가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서 멀어져 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니다. 어느 해에는 뜻하지 않게라도 마주치게 될까 봐 그가 나타날 만한 곳이라면 애써 피해 다녔다. 그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나 억지 마음을 쏟아보기도 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마음에 없는 심한 말을 쏟으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하면 감정이 정리될 줄 알았다. 그가 전혀 생각나지 않도록 푹 빠지게 만드는 멋진 사랑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종료 조건이 없어 끝없이 동작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그라는 무한루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거였는지 모른다.


“그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어?”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주 묻는 말이다. 

“사실 그가 무성의하게 대할 때도 많아. 그럴 때면 자꾸만 나 자신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야. 한순간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바보, 머저리’라며 자책하는 날도 많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치열하게 열정을 태우는 그를 보게 되었어. 그 뒤로는 그의 마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더라.”


그를 향한 마음이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기에 언제나 칭찬받는 것도, 누구에게나 환대받는 것도 아니다. 그를 향해 ‘죽일 놈’을 외쳐대는 사람들도 있고, 때로는 애꿎은 그의 가족들까지 들먹이며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곁에서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럴 때도 오래 흔들리지 않는다. 위기가 닥쳐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어주었다.     


지난 10월 28일은 그뿐만 아니라 내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가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거의 7년 만에 다시 보았다.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데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눈가를 적셨다. 그를 둘러쌓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좋아하던 일을 다시 할 수 없을 수도 있었던 큰 사고,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터무니없는 온갖 유언비어들. 전락할 수 있는 최악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그를 괴롭혔음에도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잠시 주춤거리기는 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뚝이처럼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하루하루가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라며 안쓰럽게 지켜보던 우리를 달래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떠났다. 바쁜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던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 의식하며 돌보지 못했던 자신을 위해 오롯이 시간을 쏟아붓고 싶다고도 했다. 잘 다녀오라고, 당신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내게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내년 봄까지는 어떠한 궁금증이 있어도, 어떤 소식이 들려와도 그를 만나지 않을 거다. 아니 만나고 싶어도 절대 만날 수 없다.


컴퓨터를 켜서 그가 나온 영상을 하나하나 클릭해 본다. 

‘어떻게 저렇게 입고 다녔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차근차근 보고 있노라니 그의 촌스러운 옷차림에 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다. 그의 등장과 함께 울려 퍼지던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가슴을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게 만든다. 영상이 미디어 파일이 아니라 녹화 테이프였다면 오래 입어 허리춤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큰아들의 수면 바지처럼 축 늘어져 제대로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기아 없이는 못 살아~ 기아 없이는 못 살아~

기아 없이는 못 살아~ 정말 정말 못살아~ (기아!)     

기아 없이는 못 살아~ 기아 없이는 못 살아~

기아 없이는 못 살아~ 정말 정말 못살아~ (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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