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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적 사회주의자 Dec 09. 2019

[청년정치 기획연재2] ‘아저씨’와 달라야 ‘청년’이다

by 김선기(민주적 사회주의자 편집팀)

문화연구자 오혜진의 저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읽었다. 이 책은 ‘문학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영역이었다는 전제 위에서, 오늘날 ‘문학적인 취향’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에 세대와 젠더라는 갈등의 축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세밀하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다소 도식적으로, 그리고 내 식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기성세대-남성’ 독자는 현재 문학 영역에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숫자가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 고유의 취향이 ‘문학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의 취향은 오늘날 문학의 생산과 소비, 유통을 가로지르는 문학상이나 등단 제도, 비평 영역 등 모든 제도 영역에 전체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반면 ‘청년세대-여성’ 독자는 그들이 가진 구매력이 오늘날 문학시장을 어느 정도 좌지우지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주류라고 보기 어렵다. 이들의 취향은 여러 방식으로 그 정당성이 훼손당한다. 비평가들이 이런 취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들을 ‘소품’ 취급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된 작품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이 취향이 ‘문학적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기성세대-남성’의 특수한 취향을 시공간적으로 보편적인 ‘문학성’으로 인지하고 있는 기존 문학계 주체들은 ‘청년세대-여성’ 취향의 문학을 많이 팔리기는 하지만 문학성이 낮은 것으로 보면서, ‘청년세대-남성’ 문학을 문학계의 미래를 이끌 적자로 발견하고 띄우기 위해 애쓴다. 생산자나 소비자의 연령대가 젊어졌지만, 그 문학이 가진 성격 자체는 ‘기성세대-남성’의 향수에 부합하는 작품이 ‘선택’된다.     


 그러나 이같이 과거 만들어진 문학성의 기준에 맞추어 ‘문학적인 것’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들고 그 정통성을 강화하는 방향의 시도는 문학의 확장 가능성을 닫음으로써 오히려 문학, 특히 ‘순수문학’의 재생산과 생존에 위협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문학적인 것’으로부터 배제당한 취향들은 기존 문학계가 만들어 놓은 틀 안으로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웹소설과 웹툰 등 새로운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서사 안에서 자신들 고유의 문학적 체험을 개척해나간다. 오혜진의 분석은 이 지점에서 가장 흥미로워진다. 앞세대가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 자기 영역을 지키려 하는 폐쇄적인 시도가 오히려 뒷세대의 새로운 기준을 통합하지 못함으로써 자기 영역을 잃게 만드는,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반복되어 온 세대교체의 역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언제나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라는 것.     

이 책은 ‘문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다. 기존의 문학적인 것이 '기성세대-남성' 중심이었던 것처럼, '진보 정치'도 유사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상의 서술에서 ‘문학적인 것’의 자리에는 수많은 다른 명사들이 대입될 수 있다. 그 자리에 ‘진보 정치’를 넣어보면 어떨까? 문학에서의 ‘아저씨(기성세대-남성)’ 독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보 정치의 개념과 역할, 방향에 대한 특수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아저씨’들이 존재함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들은 한때 누구나 그렇듯 청년이었지만, 시간이라는 순리에 따라 2019년 현재에는 ‘586’과 같은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나이를 먹어 ‘젊음’이나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 스스로 아쉽겠지만, 대신 이들은 ‘경륜’이라고 하는 것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취향은 현재 진보 정치판 내에서 여전히 목소리와 권한이 가장 크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진보’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가장 정당하고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라고 믿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젊었던 80년대의 문제설정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에 대해 정치사학자 김원은 ‘장기 80년대’의 태도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직접 정치를 하는 정당 정치인과 유권자들을 포괄하는 정치 영역의 ‘아저씨’들이 이런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들이 다음 세대, 즉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독특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자신들의 문제의식이 후배들에게서 반복되지 않음을 마주했을 때 일정한 상실감을, 상실감을 넘어서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공식적인 술자리나 익명 게시글 등을 통해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 정치하겠다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때와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과 불만만 있지 시대정신과 국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다. 꼭 사회구성체 논쟁 수준의 이론적인 깊이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정치도 그때그때의 유행만 좇아갈 줄 알지 장기적인 정세 인식이나 전략이 안 보인다. 좌파가 정치한다는 건 결국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이어야 할 텐데, 애들은 민중 얘기 말고 자기 삶을 얘기한다. 이게 자꾸 심해지니까 여성이니 청년이니 장애인이니 성소수자니 지역이니 하는 온갖 정체성을 끌고 들어오는 청년들 덕분에 진보는 나날이 분열되어 간다. 한마디로 진보에 대한 고민이 없고 전략이 없고 진정성이 없는 게 요즘 청년들 아닌가 싶다.     


 누가 뭐래도 현재의 권력인 이들이 가진 시각은 결국 이들이 믿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권한을 분배하지 않음으로써 진보 정치가 전반적으로 고령화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직접 정치에 나서보겠다는 젊은 당원들이 언제나 많았지만, 언제나 이들은 ‘적자’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모자랐고 ‘참신한 인물이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됐다. 이들이 젊은 진보 정치인들의 출현을 반가워하거나 여러 방식으로 ‘밀어주는’ 경우들도 있는데, 경향적으로 보면 주로 자신들의 과거를 닮은 청년들이 ‘적자’에 가까운 이들로 여겨지는 듯하다. 명문대 출신의 남성, ‘민중’을 위한다는 말을 ‘다수 청년’을 위한다는 말과 같이 대강 돌려서 구성할 줄 아는, 그러니까 ‘철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 전략을 논하는 ‘요즘 청년답지 않게 보이는’ 그런 청년에게서 가능성을 보는 게 ‘아저씨’들이 가진 시각이다. 그 시각이 가진 정당성과 확장성이 점차 쇠퇴하고 있으며, 새롭게 부상하는 ‘진보 정치’에 관한 시각에 의해 적극적으로 도전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다.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르겠다.     


 보통 새로운 ‘진보’를 찾는 ‘아저씨’들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의 정치를 이야기하는 젊은 사람을 청년의 대표로 보고자 한다. 20대이거나 30대이기만 하면, 혹은 생김새 상으로 젊어 보이기만 하면 곧바로 ‘청년’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버리는 게으른 분류법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탓이다. 출신 지역과 계층, 연령대, 젠더, 학력, 직업 등 인구사회학적 속성은 물론 이들이 가진 세계관에 따라서도 청년세대는 전혀 같지 않고 따라서 20~30대 인구를 ‘청년’이라는 한 단어에 담을 방법이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청년’은 거의 언제나 어떤 청년을 선택하고 어떤 청년을 배제하는 언어이며, ‘아저씨’들에게 가장 익숙한 청년이 진보 정치를 이어갈 ‘청년’으로 선택될 때 다른 청년들은 진보로부터 배제당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문제는 ‘진보 정치’의 의미는 이미 다시 쓰이고 있다는 데 있다. ‘아저씨’들이 진보 정치에 관한 취향과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그 시기와 오늘은 분명히 다른 국면이며, 다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체화가 나타나고 있다. 다른 언어로 새롭게 ‘진보 정치’를 상상하는 정치 세력과 유권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민중’과 ‘노동자’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이나 LGBT 운동, 환경, 일상의 민주주의 의제 등이 덜 중요하다거나 노동/경제/재분배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다른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이들이 가진 정치에의 요구는 그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한 안티 세력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확장되고 있다.     


 진보 정치가 청년 정치인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원활한 세대교체가 결국 진보의 정당성과 힘을 재생산하는 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대교체는 그 내용의 교체 없이 기존의 이념을 대리할 다음 세대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의 ‘세대 계승’을 위한 노력은 ‘진보 정치’의 의미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기존의 진보 세력을 오히려 쇠퇴하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진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갱신하기 위해 새롭고 이질적인 주체를 계속해서 내부화할 때 진정한 조직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최근 정의당은 부대표를 여성과 청년에게 할당하여 박예휘 씨를 선출, 20대 초반의 여성 강민진 씨를 청년대변인으로 선임, 5기 지도부 여성본부장에 90년생인 조혜민 씨를 선임하였다. 이는 기성 정치에서 목격하기 어려웠던, ‘아저씨’ 취향과 먼 주체와 주제들이 당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가장 동떨어진 ‘청년’들을 조직 내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진보 정치’에 대한 희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아저씨’들에게도 좋은 전략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더욱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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