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레인지 껐나?
휘몰아치듯 씻고 입고 먹고 문 밖을 나서는 날에는 훠이~ 훠이~ 조심해야 한다. 삐끗 잘못했다가는 수렁에 빠지는 수가 있다. ‘가스레인지 껐나?’ ‘가스레인지 껐나?’ 하고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지난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시간을 20분 전으로 돌리고, 아니 30분인가? 분 단위로, 초 단위로 시간을 조정하며 문제의 구간을 찾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아내던 순간에서 ‘정지', 시야의 주변부로 전기레인지 판넬 위에 붉게 표시된 부분을 확인, 다시 확인하는 식이다. 보통은 숫자가 아니라 ‘h’ (‘h’는 전원이 꺼진 후 점등되는 잔열표시등이다)다. 하지만 소용없다. 보통 기억보다 빠르게, 불안의 불꽃이 온몸에 번진다. 활활 타오른다. 이쯤 되면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차를 돌려 집으로 들어가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주방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잔열표시등마저도 꺼져 까맣고 매끈한 판넬을 흐뭇한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럼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간 경우에는 어쩌나? 지난해 나는 2시간 반을 달려 목적지인 평창 도착을 삼십 분 남겨두고 가스레인지 수렁에 빠졌다. 조용히, 아무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 여행을 시도했다. ‘며칠 집을 비울 거니까 냄비들 정리 해두고 가야지.’ 하며 판넬 위에 놓여있던 빈 냄비를 들어 올리던 순간, 그 순간으로 갔다. ‘설마, 판넬에 열이 들어와 있었다면 그때 알았겠지.’ 냄비를 들어 올렸던 손을 만지며 불안을 누그려 뜨리려고 애썼다. 그럭저럭 지나가는 듯했는데, 저녁을 먹고 숙소에 짐을 푸는 중에 불안이 화마처럼 치솟았다. “집에 갔다 오자. 불안하면 여행도 못해. 며칠이나 더 있다 갈 건데 확인하고 와서 편하게 쉬다 가자.” 남편이 말했다. “아니야. 불이 났으면 이미 났을 거야.” 내가 말했다. 합리적 사고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수렁에서 나왔냐고? 절박했던 나는 이웃 찬스를 썼다. 물어물어 전화번호를 구해 이웃에게 문자를 보냈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저 앞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제가 멀리 여행을 왔는데 가스레인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와서요. 다급한 마음에 연락드렸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확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황. 하지만 그 보다 확실한 수렁 탈출 작전은 없었다. “물론이죠. 가봤더니 전기레인지는 꺼져있는데 화장실 불이 켜져 있더라고요. 제가 끄고 나왔어요. 여행 재밌게 하고 오세요!” 상황 종료. 폴짝, 문자를 받은 나는 수렁 밖으로 가볍게 튕겨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