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나에 대한 변명 ㅣ you의 리투아니아 생활기
나는 더 이상 시작이 느린 아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이게 난데
뭐, 어쩌라고
리투아니아에서의 세 번째 잡념 #시작이 느린 아이
나는 시작이 느리다.
항상 주위 사람들에 비해 시작이 느렸다.
나는 시작이 느린 내가 너무 싫었다.
신중한 건지 아님 단순히 미루는 건지
성격은 급한 것 같은데,
생각도 많은 것 같은데
항상 행동으로 옮기는 게 힘들었다.
악순환의 반복.
생각만 하면서 가만히 누워있는 내가 싫었고
나보다 한창 앞서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내가 싫었고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끝을 걱정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모두가 경주마를 타고 앞서 나갈 때
나 혼자만 당나귀를 타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느낌
그저 앞서 나가는 경주마들이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한숨 쉬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
'아니? 난 아직 시작 안 했는데..?'
난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 뒤에 이어지는 씁쓸한 변명.
사실 속으로는 아직 시작조차 안 한 나를 엄청 혐오하고
앞으로 나에게 주어질 산더미 같은 일에 걱정하면서
괜찮은 척, 쿨한 척하는 바보였다.
그냥 불안하다고 솔직히 말할 걸.
한국을 벗어나도 시작이 느린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 오기 전부터 블로그를 시작해야지 생각했으면서
언제나 나처럼 미루고 있을 때
벌써 다른 교환학생 친구들은 블로그를 시작했고,
수강 신청 날짜가 다가오기 전까지
강의 목록을 펴보지도 않은 나에 비해
다른 친구들은 벌써 시간표 2안까지 짜고 있었다.
솔직히 시작이 느린 나를 다시 질책하기는 했다.
그런데 하나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불안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긴 경쟁사회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을 때 시작하면 되는 거고,
마감 전까지만 내가 알아서 조정하면 되는 거고
누가 빠르고 누가 느리든 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불안감'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한국에서의 22년
나의 인생은 항상 경주마들로부터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에서의 학생들이 누구나 겪는 그 세상.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영어 교육,
뭣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했던 중학교 시절,
어쩌다 보니 와있었던 외고에서의 대학 입시,
그리고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한 대학교에서의 사투.
나에게 주어진 길은 오직 하나였다.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직진할 수밖에 없는 길.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닌데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면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우리는 그저 작은 점일 뿐인데
누가 어디로 달려가든
잠시 기대 쉬어가든
걸어가든 기어가든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데
나는 더 이상 시작이 느린 아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이게 난데 뭐
어쩌라고
2018.01.18~ KAUNAS, LITHU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