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시계보다 빠르게 흐르는 판교의 시계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그 생각만으로 벌써 일 년이~
지나버렸다.
전 회사 팀장님과의 퇴사 면담, 스타트업 인턴 지원, 동료들과의 첫 회식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판교의 시계는 국방부의 그것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던 것 같다. 이대로는 시간이라는 녀석에게 계속 끌려다닐 것 같았기에 지난 1년간의 경험을 정리해보고, 또 앞으로의 1년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작년 9월 했던 나의 이직은 두 개의 큰 전환을 내포했다. 하나는 대기업에서 스타트업, 즉 전혀 다른 업무 환경으로의 전환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대 출신 엔지니어에서 마케터라는 완전히 경험해본 적 없는 직종으로의 커리어 전환이었다.
환경의 전환은 대 성공이었다. 정해진 프로세스를 준수하며 주어진 일을 빈틈없이 완수해나가는 대기업 업무환경보다는, 나 스스로 권한과 책임을 갖고 목표를 설정해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목표한 바를 달성해나가는 지금의 환경이 나에게는 더 맞다(물론 모든 회사가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나에게 더 적합하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이직을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업무환경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좋다.
커리어의 전환 역시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취업에 유리한 이과 붐이 있었기 때문에, 또 남들보다 수학을 조금 더 잘한다는 이유로 큰 고민 없이 이과, 그리고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전 직장에서 퇴사를 고민할 때, 나에 대해 깊숙이 관찰하고 고민해보면서 '나는 공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단편적인 예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학 수업을 꼽았을 때, 경영대 수업에서 치킨 세트 배달로 큰 성과를 냈던 것, 그리고 한국문학사 수업에서 군산 답사를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직접 체감하고 글을 썼던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맞는 업무환경을 고민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직종 전환을 생각할 때에도 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만족도나 처우보다는 '나'에 대해 더 조사하고 깊이 고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진실한 만족과 행복이 느껴져야 성공적인 이직을 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이직 후 1년 내내 불안을 안고 살아갔다. IT 업계, 마케팅에 대해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항상 불안감과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라도 더 채워나가려고 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회사에서 퇴사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불안'이었다. 하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이었다. 당시에는 전문성이 올라가지 않는 것 같다는 불안,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다는 불안, 100세 시대 평생직장은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 등이었다. 마치 사육사가 때 되면 먹이를 던져주는, 동물원의 사자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울타리가 없어지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역량을 키우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가 2가지 이상의 메인 job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것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직을 하면서 위와 같은 종류의 불안은 사라졌다. 하나에 몰입하고 실력을 쌓으면 모두가 나의 자산이 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일과 삶의 철저한 분리가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일이 자리하고 있다. 대신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지금 너무 나태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과 불안들이 머릿속에 자주 맴돈다. 이 또한 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잠식되지 않고 건강하게 불안을 다루어야겠다.
스타트업은 성장을 부르짖는다. 말로만 성장을 외치고 실상은 변한 게 없는 유체이탈 화법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다.
최근 스푼 라디오 대표님의 인터뷰를 보고 다시 한번 멋진 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아직 안 봤다면 꼭 한 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은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대표님의 여러 이야기 중 실패하되 실수하지 말자라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 나의 상황에 필요한 한마디라고 생각했다.
마케터로 1년을 일하면서 나 스스로는 이제 걸음마를 뗀 정도라고 생각한다. 정말 배울 것 투성이다. 하지만 팀 멤버로서 일을 할 때에는 프로의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현재 나의 상태로 낼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들어야 한다, 실수 없이. 개인적으로 이러한 마인드를 깊게 내재화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결과물의 차이가 많이 났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와 '2% 부족한데'는 정말 종이 한 장 정도의 마인드 차이지만, 아웃풋은 전혀 다르다.
흔히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디테일의 가치가 가려지는 말인 것 같아 잘 쓰지 않는 말이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실수 연발이면서 숲만 보는 것은, 설득적이지 않다. 건강한 나무가 모여 건강한 숲을 이루는 것이다. 앞으로의 1년은 다가올 10년의 태풍을 대비해, 튼튼한 실력 나무를 하나씩 심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프로정신을 함양하는 방법이다.
얼마 전 IT 종사자들의 뜨거운 감자였던 '판교 사투리' 브런치 글. 팀 메신저에도 공유되어 많이 웃고 여러 번 회자되었다. 그중 가장 공감이 갔던 것은 '유튜브 해야 되는데'였다. 정말 식사시간에 누군가 한 명쯤은 항상 이야기했던 판교 방언이었다.
그런데 사실 유튜브를 해야 된다라는 말은 어패가 있다. 유튜브는 동영상 콘텐츠를 올리는 플랫폼에 불과하며, 결국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공감과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주제가 있다면? 유튜브든 네이버든 브런치든 콘텐츠 유통채널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콘텐츠 플랫폼보다 콘텐츠 공급자의 위상이 더 높아보인다. 애플이 콘텐츠 사업에 발을 딛고, 디즈니의 주가가 올라가는 상황들이 작금의 콘텐츠 시장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알라딘, 라이언킹과 같은 콘텐츠들은 누가 봐도 '디즈니'의 것이고, 대다수가 재밌어한다. 앞으로의 1년은 나 스스로가 알라딘, 라이언킹과 같이 나만의 확고한 색을 내고,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되고자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인생이 각각의 독창적인 콘텐츠지만, 글이든 영상이든 어떤 형태로든 기록되고 보여야 그 의미가 증폭된다고 생각한다.
앱 사용자 대상 콘텐츠를 만들 때처럼 나 스스로가 좋은 콘텐츠가 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것을 잘 표현하는 노력을 동시에 해야겠다. 나 스스로가 좋은 콘텐츠가 되어 널리, 떳떳하게 알려져서 회사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