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친구 여섯과 함께 만든 계모임이 있다. 계명은 내가 알아서 할계. 서로에게 하는 잔소리가 하도 많아 입버릇처럼 말하던 문장이 모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 모임이 특별한 이유는 매년 말일, 그러니까 매 12월 31일에 만나서 그 해의 마지막 해넘이를 함께 보고, 다음날 새로운 해를 함께 맞이하는 데에 있다. 재작년 연말에는 20대의 마지막 해가 넘어간다느니, 진정한 아재가 되었다느니 하면서 서른이 되는 것에 대해 서른 가지는 족히 넘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
2020년, 31살이 되었다. 우리의 모임은 소소했다. 서른이 서른하나가 되는 건, 나이가 하나씩 들어가는 건 이제 우리에게 호들갑을 떨 정도의 이벤트는 아니게 된 것 같다. 거창한 새해 목표 같은 것도 잘 세우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게 학습이 되어서인 듯하다.
그래서 미래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 확신이 생긴 생각이나 가치관에 대해서 정리해보고 싶어 졌다. 31살에 서서히 확신이 들고,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을.
나는 정리를 잘 못한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옷가지를 내팽개치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든 뭐를 먹든 한다. 딴에는 사소한 것에 신경 안 쓰고 중요한 것에 집중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편안하고 안락해야 할 집이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공간이 되었다는 걸 느끼게 된 순간부터, 정리라는 걸 시작하게 되었다. 정돈되지 않는 공간에서는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부터, 청소와 수납을 신경 쓰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습관으로 자리 잡았겠지만, 나 스스로는 정리정돈이 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 같다.
일도 마찬가지다. 정리하지 않으면 내가 한 일이 무의미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내가 애써 한 일들이 좋든 나쁘든 회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야 일에 재미를 붙일 여지가 생긴다. 내가 한 일의 성과를 측정해서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는 것, 이것이 일에서의 정리이다.
시쳇말로 길치들은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정확히 모른 상태에서도, 멈춰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인생의 길치가 되지 않으려면 잠시 멈춰 서서 내가 그린 발자취를 보고, 목적지를 확인한 뒤 그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잠시 멈춰보자. 그리고 내가 그려 온 발자취를 '정리'해보자. 그러면 내가 곧장 나아가야 할 목적지가 희미하게나마 보일 수 있다.
요즘 무언가 난잡하고 혼란스럽다고 느낀다면, 구글 드라이브 폴더든 내 책상이든 지금 정리를 시작해보자.
즐겨보는 웹툰 중 이동건 작가님의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웹툰이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을 세포 하나하나로 비유해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유미가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감을 느꼈다면, '사랑 세포'와 '출출히 세포'가 출연해 '이건 사랑하는 사람과 먹어서 행복한 거야', '이건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행복한 거야'라며 서로의 근거를 무기로 논쟁한다. 근데 정말 공감 100%다.
그러한 세포들 중에서도, 시기에 따라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포들을 '프라임 세포'라고 칭하는데, 내 20대 초반의 프라임 세포는 단연 '사랑 세포'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설렜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학업, 알바는 나중이었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관계 세포'가 프라임 세포였다. 모든 관계에 접점을 두고 싶어 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카피를 여기서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모임에서 무조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31살, 지금의 프라임 세포는 '행복 세포'이다. 무책임하게 퉁 쳐버리는 이름의 세포이지만 행복 세포는 계속해서 나에게 '행복'에 대해 묻는다. 넌 언제 행복하냐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성과를 만들었을 때 느끼는 성취,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보는 성과라는 과실,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감정들. 요즘의 난 이럴 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이 행복들을 자주, 항상 느끼고 싶기 때문에 이 행복들을 생각하며 self-motivation 한다.
20대의 프라임 세포였던 사랑 세포, 관계 세포도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행복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행복은 그때의 행복이다. 그때는 맞는 행복이었지만 지금은 틀리다. 지금의 내가 정의하는 행복은 20대의 그것보다는 명확하고 잘 정리되어 있다.
그때의 맹목적인 감정 세포들이 가끔, 아주 가끔은 그립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행복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요즘이다.
투잡의 바이블, 신사임당 유튜브 채널에서 본 내용이다. "90%는 운이다. 나에게 오는 것들 중 어느 것이 기회일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받아들이자."
물론 맞는 말이다. 90%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결과는 운이 상당수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운을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1년 전 대기업에서 퇴사를 결정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지금의 일을 지금의 회사에서 일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좋은 회사에서 좋은 사람들과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일하는 것은,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이직한 첫 회사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았다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용기가 없어 퇴사를 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느끼는 이 행운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다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나에게 발 하나 디딜 틈이 없다. 내가 되고 싶은 무언가, 또는 되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비슷한 어떤 거라도 작게 시작해보자. 최대한 많이 씨앗을 뿌리자. 90%의 운은 어떤 씨앗을 통해서 당신에게 다가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운이 다가올 환경을 만드는 일에 100% 집중하자. 신문기자,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일기든 칼럼이든 뭐라도 쓰고 세상 사람들에게 내보이자. 운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우리를 찾아내기 어려워한다.
모든 일들은 90%의 운에 기인한다. 그러나 0 곱하기 90은 0이다.
요즘 들어 글쓰기가 부쩍 어려워진 것 같다. 잘 정리되고 완벽해 보이는 콘텐츠 홍수 속에서, 난잡하고 불완전한 내 생각들을 내보이는 게 부끄러워서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브런치의 발행 버튼을 누르는 이유는, 어지러운 머릿속 생각들을 활자로 펼쳐놓고 보면 스스로를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책상 서랍 구석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웹이라는 바다를 떠돌며 익명의 한 두 사람에게나마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글쓰기에 대한 이유는 충분하다며 스스로 용기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