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J의 성향을 가진 나의 아내는 '번개(갑자기 약속 잡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면,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나의 게으름과 낮은 체력 탓에 휴식시간을 고려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쉴지도 계획에 넣는다. 가끔 계획이 부실(?)한 듯 해보여서, "자기가 웬일이야?"라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응, 그것도 계획이야. 그 시간동안은 마음대로 쉬라고^^" 이런 식이다.
그래서, 데이트를 할 때도 행선지를 급선회한다든지 메뉴를 바꾼다든지 하는 행위는 성사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나 같은 P들은 계획이 있든 없든 일정을 변경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물론 나도 때에 따라 다르긴 하다)은 아니지만 꼼꼼히 계획을 세우는 아내 같은 J들에겐 그것이 매우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인 듯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더운 여름날 저녁이었다. 고난한 일정을 치르고 심신이 지친 터라 힐링 차원에서 마사지를 한 번 받은 뒤 산책을 하던 우리 부부는 목적지 없이 걷고 있었다(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내에겐 목적지가 있었을 듯). 문득 아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영화 보러 갈까?"
음? 갑자기?
나는 속으로 의아했지만, '갑자기 영화 보러 가는 행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웬일이야?? 나야 좋지~!"
...
"근데 진짜 왜 그래? 뭔 일 있어?"
"아니 그냥 ㅋㅋ 갑자기 그러고 싶네."
믿기 어려웠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보고 싶다는데 뭐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예전 같으면 마냥 신나서 룰루랄라 예약하면서 즐겼을텐데, 괜히 한 번 더 찔러보고 싶었다.
"진짜 보고싶은 거 맞아? 누가 탑건 엄청 재밌다고 해서 그런건가?"
"뭐 그런 것도 있는데, 그냥 보고 싶어서~ 왜, 자기는 싫어??"
"아니 나는 좋지~~~ 근데 범죄도시 2 보면 안돼?"
"안돼~ 그건 집에서 보자니까 나중에."
역시 J는 J다. 여기서 아내가 범죄도시 2를 집에서 보자고 하는 이유는, 굳이 큰 화면으로 비싼 돈 주면서 영화관에서 볼만한 장르가 아니라는 뜻이다. 전편에서 이어지는 아내의 투철한 절약정신에 기반하여, 아무 영화나 극장에서 보지 않는 것이다. 마블 시리즈 같이 스케일 큰 영화가 아니면 극장을 가지 않는 것이 내 아내의 스타일이다. 신작 영화를 빨리 보고 싶을 때는 좀 속이 타지만, 아내의 스타일을 존중한다. 아끼면 우리 돈을 아끼는 것이니까.
그렇게 우린 급작스럽게 영화관을 찾았고, 신도시의 평일 저녁답게 극장은 썰렁...하지 않고 생각보다는 사람이 꽤 들어왔다. 1인용 팝콘 하나와 아아 한잔을 들고 들어간 우리는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탐 크루즈 형님의 열연과, 클리셰로 범벅이 됐지만 꽤나 흥미진진했던 미국식 액션 영화 한편을 진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