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준호 Jul 09. 2018

14화. 작별! 새로운 시작!

에필로그, MBC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드리는 1분 스피치 주제는 '회자정리'입니다." MBC에 입사해 OJT교육의 마지막 관문은 교무실 같은 아나운서국 벽면에 세워져 선배들이 준비한 주제에 1분 내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50여 명의 아나운서 선배들 앞에서 치러지는 면접아닌 면접이자 어쩌면 최종 시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나운서로 인정 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받은 질문의 주제가 '회자정리'라니, MBC를 떠나고자 마음 먹던 날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올랐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은 본디 불교용어에서 온 말이다. 불교경전 유교경(遺教經)에는 '세상은 모두 덧없는 것이니 만나면 반드시 이별이 있다(세개무상 회필유리, 世皆無常 會必有離)'라 했고, 열반경(涅盤經)에서는 '흥성함이 있으면 반드시 쇠퇴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부성필유쇠 합회유별리, 夫盛必有衰 合會有別離)'라고 하였다. 결국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관계의 무상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 막 만난 후배에게 던졌던 질문으로는 참 얄궂은 게 아니었나 싶다.


되돌릴 수 없는 버튼    


2018년 2월 7일이었다. “한준호 아나운서, 혹시 저희와 함께 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당시 스타트업 투자자들인 VC(Venture Capital) 심사역들의 이야기를 묶어 책을 쓰려던 나는 정부의 한 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정책보좌관과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리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MBC 재직시절 ‘정치’라는 단어로 얼마나 오랫동안 방송 일선에서 떠나 있었던가. 이제야 방송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책으로 소일하며 보내려던 내게 그가 던진 한마디는 앞으로의 인생에 큰 모험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당시 그의 말을 듣고, 나도 몰랐던 내 소심함은 결국 고열과 함께 이틀을 앓아 눕게 만들었다. 잠시 링거를 꼽고 고열에 시달리던 그 때 처음 MBC라는 곳에 시험을 보기로 했던 시절을 생각해 봤다.   

  

“여보세요? 한준호씨?  MBC 인사부입니다.” 남들 모르게 3개월 간의 MBC 전형을 마친 후 최종 면접 결과를 기다리던 그날 퇴근무렵이었다. 오후 3시면 발표를 한다던 최종합격 통보는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홈페이지에도 공지가 없었고, 하물며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전화 한통 오지 않았다. 이미 3시부터 바짝바짝 타기 시작한 목은 물을 마시겠다는 생각도 없이 내 정신과 함께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코스닥시장(현 한국거래소)에서 근무하던 나는 그 전화 한 통화에 더욱 숨을 죽이고는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치 큰 비밀이라도 숨기듯 조용히 잰걸음으로 한 층 위에 있는 공시팀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형님~!!” 내게 처음 방송사 시험을 권했던 선배의 어깨를 뒤에서 살며시 잡았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린 선배는 내 손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로 걸어나갔다. “붙었지?” 난 조용히 선배의 눈을 보며 “네~”라고 대답했다. 우린 10여 초 얼싸 안았고, 남들이 볼새라 얼른 떨어져 눈으로 축하의 인사를 주고 받았다. 2003년 11월이었다. 나는 그 회사에서 직장을 다니며 최고의 언론사라고 자부 되던 MBC에 합격하며 사내 파란을 일으켰다.    


“한준호 아나운서? W 의원실의 ooo보좌관입니다.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처음 내게 제안을 했던 보좌관과의 만남이 있은지 며칠 되지 않아 해당 의원실 보좌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실 내 마음의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았지만, 제안한 측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은 그런 여유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물론 내게 시간이 더 있었다고 해도 이 사태를 막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나는 되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방향이든 아니든 이건 내게 그냥 운명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준호입니다.” 의원실 회의실에 주욱 앉은 세 분의 보좌관들은 다른 의원실에 비해 연배가 높아 보였다. 한 시간을 조금 넘긴 대화를 통해 나는 마음 속으로 ‘MBC를 떠날 때가 되었구나’라는 판단과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명박정권 초기, 노동조합 집행부 생활을 시작으로 접게 된 방송인 생활은 9년이 흘러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이은 문재인 정부 탄생과 함께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지만, 이제 거울을 통해 보이는 수많은 흰머리와 늘어난 체중보다 과연 그 시절의 생활과 같을지, 한참 떨어져 있던 사람들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앞섰다. 수 년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다른 부서를 전전하던 선.후배들과는 긴 세월 속에 이미 소원해졌고, 아나운서국에는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후배들과 더욱이 방송 환경이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바로 위 기수로 6년 차이의 선배가 있었고, 밑으로 4년 차이의 후배가 있었다. 남자로서는 유일한 40대였으니 어쩌면 내게는 그냥 버텨도 승진에는 큰 지장이 없었을지 몰랐겠지만, 적어도 MBC는 내게 직장이 아닌 아나운서라는 직업인으로서 생존해야 했던 장소 이상의 의미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대답 하나를 듣기 위해 버텨온 9년이란 시간의 끝에 이런 제안은 간절함이 사라진 내게 방송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나는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버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원실을 나오는 길에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아직 받은지 채 20여 분이 되지 않은 명함이라 전화번호를 기록도 하지 못했던 W 의원실의 보좌관이셨다. “한준호 아나운서, 내일 오전 의원님께서 뵙길 원하는데 시간 되시겠죠?” 순간 ‘올 것이 왔구나, 숨 쉴 틈도 없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공식 : f(끝)=시작    


그날의 아침은 더디게 왔다.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니 미안했고, 옆방에 들어가 곤히 자고 있는 막내의 얼굴을 맞대며 불안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앞길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간다니 한준호 미쳤구나’ 그런 불안감에도 새로운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아침이 밝으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했다.    


내 오른손 약지 손가락은 완전히 구부러지지 않는다. 산을 좋아했던 내가 비오는 날 산행에 나섰다 하산 길에 미끄러지며 다친 손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결국 끊어진 인대가 어설프게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힘을 줄 수 없는 약지로 인해 당시 깊게 빠져있던 스포츠 클라이밍을 그만둬야 했다. “한선생, 올라가든지 내려오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지 그렇게 잡고 있으면 힘 빠져서 어짜피 떨어져요” 집 근처 문화센터 내 위치해있던 스포츠클라이밍장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특히 매주 수요일에는 몸에 로프를 묶고 대략 5~6m 정도 높이에 위치한 목표물을 찍고 내려오는 수업을 진행했는데, 매번 3m쯤 올라가면 그 높이에 겁이나 매달리곤 했던 것이다. “한선생, 무엇인가를 잡으려면 하나를 놓아야죠. 매번 그 자리에 매달리려면 힘들여 올라가지 말고 다른 걸 연습하세요” 내가 사부라 부르던 선생님은 유난히 실력이 늘지 않는 나를 그런 식으로 나무라곤 하셨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지금의 내 결정에 용기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MBC에 머물러 있자면 이런 고민 저런 고민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오늘이 그 날이 되고 만 것이다.     


“반갑습니다” 언론을 통해 보던 중진의원의 모습보다 훨씬 젊고 겸손한 모습이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한준호입니다”

의원실 내로 들어가는 나를 전날 만난 보좌진들과 비서진들이 마치 선수를 링에 올리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내 본의로 야인이되었다. 선택이란 좋고 나쁜게 있는 것이아니라 어느 순간 무슨 이유로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15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15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그 헤어짐 뒤에는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3화. See it now!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