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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준호 Jun 17. 2018

7화. 무간도(無間道)

면접 편_04, 인생을 바꾼 두 개의 질문

가행도(加行道), 승진도(勝進道), 해탈도(解脫道)와 더불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도(四道) 중 하나인 무간도(無間道)는 번뇌에서 벗어나 막힘이 없는 단계, 즉 번뇌를 끊는 단계를 이른다고 한다. 그 무간도라는 제목의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 배우 양조위로 인해 수없이 돌려보았다. 경찰이 되어 조직폭력배를 연기해야 했던 양조위, 조직폭력배로 들어가 경찰을 연기해야 했던 류덕화, 두 사람의 바뀐 인생은 가끔 내 인생과 비교되어 어쩌면 일생을 번뇌 속에 살아가다 무간도로 들어갔을지 모르는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에 애잔함을 느꼈던 것 같다.


번뇌란 일종의 욕심에서 오는 것으로 번뇌를 끊어내는 것은 그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언어 역시 그렇다. 잘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 그 자리에 서있는 이유와 욕심 때문이다. 조금은 자신을 버리고 힘을 뺄 필요가 있다. 스피치의 기본은 좋은 스킬로 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내려놓고 진정성을 갖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MBC 합격의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무엇이 합격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세요?


3차 심층면접 겸 2차 카메라 테스트의 결과 발표가 있던 주말 아침이었다. 최종면접에 올라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차 있는 상태였고, 아나운서가 될 것이라는 것은 내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공중파 아나운서 시험 최종까지 올라갔었어’라는 한계를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운 좋게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최종 면접에서 압도될 것이 뻔한 분위기와 질문들에 문득 발가벗겨진 채 집 앞에서 벌 받는 아이 심정처럼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준비하지?’ (자료화면 : SBS 드라마 중)


최종 면접장은 임원실로 그 앞에는 여자 지원자들에 앞서 남자 지원자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약 1,000여 명으로 시작했던 시험은 이제 3명으로 압축되어 있었고, 사실 그 순간이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진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야 긴장을 떨어뜨리기 위해 복식호흡을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지식이 전혀 없던 때라 그 긴장감은 더했던 것 같다. 다만, 어차피 이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내가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한준호 씨?” 인사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일찍 온 내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제가 한준호입니다.” “그냥 힘내시라고 말씀드리는 건데, 현재 성적으로는 가장 낮으세요. 이번 임원 면접에서 만회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막상 셋 중 꼴등이라니 왠지 들러리 같기도 하고,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세 분 모두 반갑습니다. 지난 1차 카메라 테스트에서 각자 다른 원고들을 받으셨을 텐데요. 그대로는 기억 못 하실 테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각자 설명 부탁드립니다.” 순간 욕이 나올뻔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아니 3개월 가까이 지난 원고를 내가 어떻게 외워?’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첫 번째 지원자가 자신의 원고를 술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게 경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들으니 다들 아나운서 시험을 두세 번 치러본 경험이 있었는데 비해 나는 이 시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말이다. 다행인 것은 1차 테스트에서 쓰이는 뉴스 원고는 3가지였고, 첫 지원자가 읊조린 원고는 내 원고와 같은 것이었기에 어영부영 비슷하게 넘어갔다. 두 번째 질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무엇이며, 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생각하고 오프닝 멘트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질문들에 지금도 대처할 자신은 없다. 그런데, 스포츠 중계를 해봤던 두 사람은 너무 자연스러운 진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머리에서 점수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 많은 점수를 잃었던 것이다. ‘기회가 올 거야’


“세 분은 최종까지 올라오셨다면 타 방송사 시험들도 봤을 텐데요. 우리 회사에 지원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드디어 말을 아끼시던 사장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3개월이 지난 뉴스원고도 달달 외우고, 스포츠 중계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하던 두 사람이 이 질문에 그동안 내가 하던 모습처럼 ‘어버버’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토릭에 대해 설명하는 장에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질문에 답변 중 자기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도 공감을 형성하기도 어렵다. 두 사람이 헤매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점수를 만회할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했고, 면접관들이 왜 아직 방송에 대해 전혀 감이 없는 나를 뽑아야 하는지 설득을 해보자 마음먹었다. 


“저는 현재 증권 유관기관 홍보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여 명 정도 되는 출입기자들과 잦은 만남이 있는데요. 한 번은 제가 MBC 출입기자에게 임원들과 골프를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중히 거절을 하시더군요. 저는 예의상 그러는 줄 알고 며칠 뒤 다시 제안을 했는데, MBC에서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나가지 않으며, 특히 골프 접대는 받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MBC 외에는 다른 곳은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회사의 방침에 따라 떳떳하게 취재할 수 있는 곳이야 말로 소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언론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면접 이후 당시 보도국장님께서 사장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기술적인 질문들에 이어 들어오는 질문들은 제목을 붙여보자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장님의 질문이 하나 들어왔다. “아나운서들은 대본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빗대어 멘트를 풀어가는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각자 어떻게 창의성을 개발하는지 말씀해 보세요.” 중간에서 면접을 보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잠시 생각할 틈이 생겼고, 그 잠시의 틈에 사장님 탁상 위에 놓여 있던 MBC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MBC가 CI(Company Identity)가 너무 낡아 교체를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면접을 준비하며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저는 창의성을 위해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늘 주변을 살피며 좋은 말이나 글, 경험들을 메모하며....” 바로 앞 지원자가 너무 평범한 대답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 내 차례라 생각했는데, 다음 사람에게 질문이 넘어갔다. 나였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 역시나 그 지원자는 당황해서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사장님의 눈빛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한준호 씨 답변해 보세요”


“저는 창의성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사장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노트에는 안테나 모양의 MBC CI가 있는데요. 저는 그 CI를 현재 MBC가 추구하는 ‘글로벌 방송사’에 맞춰 바꿔야 한다는 제안을 드립니다.” 갑자기 사장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어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마지막 질문이었고, 내겐 마지막 기회였다. “MBC가 글로벌 취재를 위해 중요한 인물과 인터뷰 약속을 했다고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전화를 통해 MBC 기자입니다.라고 하면, NBC로 착각해 쉽게 30분 정도의 인터뷰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명함을 내밀면 동양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방송사의 명함을 내밀 것이고, MBC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기자는 인터뷰 시간 중 10분은 MBC가 한국에서 얼마나 유명한 방송사인지 설명하기 위해 할애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CI만 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글로벌한 MBC만의 CI로 바꾸고 그에 대한 활용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회사 입사 후 MBC는 CI를 바꾸었고, 이 대답은 최종면접에서 순위를 바꾸어 놓았다. 



최종면접에서 순위를 바꾼 두 개의 대답은 내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두 개의 대답으로 앞에서 헤매던 모습이 지워지고, 면접관들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정해진 훌륭한 답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다만,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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