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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삼열 Jun 01. 2024

도서관에 살다

  여름 휴가철에 강릉을 여행하던 중, 강릉 시립 도서관에 잠시 들러 놀았다.

  바다를 보며, 파도를 들으며, 물새의 날갯짓을 쫓으며, 멍때리고 있는데, 문득 아내가,

  “여기서 조금만 가면 도서관이 있어.”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는데, 나는 갑자기 도서관에 가고 싶어졌다.  

  “가자. 가 보자!”

  그렇게 우리는 엉겁결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오의 햇볕을 받아 도서관이 밝게 빛났다. 

  도서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었다. 초저녁의 도서관은 조용하고 고요했다. 율곡 선생의 거처가 관광객들로 붐비는 데에 비해, 도서관은 참 고즈넉했다. 어느 문화재보다도 더 문화재다워 보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좋았다. 

  아내와 나는 20여 년 전 대학 도서관에서 그러했듯, 자판기부터 찾았다. 

  “레쓰비가 있어.”

  아내가 반갑게 말했다. 레쓰비! 우리가 대학 도서관에서 매일같이 뽑아 마시던 최애 음료였다. 요즈음은 마실 일이 거의 없는 추억 속 아이템이었다. 우리는 그 옛날처럼 캔 커피를 뽑아 마셨다.     


  천천히 서가며 열람실 등을 탐방했다. 나는 읽지도 못하는 활자 책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 척했고, 아내는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을 꺼내 몇 장 읽고 다시 꽂아 넣고 새 책을 꺼내고... 를 반복했다. 물속에서처럼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가 돌연 작게 소리쳤다. 

  “여기 어딘가에 우리가 쓴 책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 책도 있지 않을까?”

  아내의 말이 그럴 듯했다.

  “미션이다. 여행 코너, 아니면 에세이 코너에 가서 찾아 봐."

  내가 반신반의하며, 그러나 한껏 들뜬 채로 말했다. 아내가 곧 미션을 수행하러 달려나갔다. 


  몇 분 후, 이윽고 아내가 돌아왔다. 아내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6년 전,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고 쓴 책이었다.

  “책이 우리보다 먼저 도서관에 와 있었어.”      

  신기했다. 우리의 얼굴이, 사진이 실린 책이 우리보다 먼저 도서관에 와 있었다는 게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여기뿐 아니라, 다른 도서관에도... 우리가 평생 갈 일이 없는, 이를테면 섬에 위치한 도서관 등에도... 우리의 얼굴이 인쇄된 책이 서가에 꽂혀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감동했다.   

  “우리가 도서관에 살고 있는 거야. 언제까지나. 우리도 모르는 먼 도서관에서.”

  아내와 나는 머나먼 도서관에 대하여, 그곳에 꽂혀 있을 우리 얼굴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었다.      


  도서관을 나오며, 나는 ‘도서관에 살고 싶다고!’, 하고 외치던 30여 년 전, 비 오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예닐곱 살 정도의 꼬마였을 때 일이다.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여름 날, 나보다 일곱 살 많은 큰누나와 다섯 살 많은 작은누나가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때였고,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를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덩달아 따라 가게 된 나는 몹시 신이 나 있었다. 생전 처음 가 보는 도서관은... 내게 있어 말 그대로 미지의 공간, 환장하게 재미있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는 아직 한글을 읽지 못했다는 거! 한글을 깨우쳤다고 해도 시각장애인이었던 내가 글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는 거! 그걸 내게 가르쳐 준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신이 나 있었다.

  그 전날부터 들떠 있던 나는 아침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고, 모자를 계속 바꿔 쓰고, 멜빵을 풀었다 채웠다를 반복하고... 바빴다. 어서 점심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쪼끄만 게 왜 그렇게 도서관에 가고 싶어 해?”         

  누나가 물었고,

  “몰라. 그냥. 빨리 가자, 응?”

  내가 재촉했다.

  “하긴, 넌 애기 때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어. 우리가 보는 책도, 아빠가 읽는 책도, 한 번도 찢은 적이 없잖아. 애 주제에.”

  “아, 몰라. 어서 가자! 응?”

  ‘쟤는 이상하게 책을 안 찢어.’,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었다. 나는 종이가 좋았고, 책이 좋았고, 책의 감촉이며 냄새 같은 것이 모두 좋았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누나들과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와. 다음에 가자.”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내내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필이면 이때, 왜 비가 내린단 말인가.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에게 다음이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돼. 비 오는 날 나가면, 엄마아빠한테 혼나. 오늘은 못 가.”           

  슬퍼하는 나에게 누나가 말했다. 

  “몰래 갔다 오면 되잖아.”

  “혼나는 건 네가 아니라 우리라고. 안 돼.”       

  나는 슬슬 부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갈아입은 옷이며 모자 등은 다 뭐였나. 

  “이럴 거면 어제 말했어야지. 갑자기 오늘 비가 와서 못 간다고.”

  말도 안 되는 땡깡을 부리며, 나는 크게 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나들은 계속 안 돼, 못, 가,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어디 가?”

  “나 혼자 도서관에 갈 거야.”

  나는 집 밖으로 뛰어 나가 버렸다.

  호기롭게 뛰어나오긴 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 도서관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고, 겨우 일곱 살짜리 꼬마가 갈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고민 끝에 차려 입은 옷이며 모자 따위가 속절없이 비에 젖었다. 내 몰골이 엉망이 되면 될수록 나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울며 한참을 걸었다. 한 20여 분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도서관 간다더니, 겨우 여기까지 온 거야?”

  열네 살의 누나가 우산을 씌우며 말했다.            

  “여기가 어딘데?”

  “우리집 맞은편 집 마당이잖아.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

  ‘나는 어딜 걷고 있던 거지? 한참 걸은 것 같은데.’, 의아했다.

  “집에 안 갈 거야?”

  누나가 물었고,

  “안 갈 거야. 도서관에 가서 살 거야.”

  내가 떼썼다.          


  30여 년 후.

  ‘결국 꿈을 이루었네. 도서관에서 평생 살게 되었어. 무심코 책을 열어 본 사람들에게 네 얼굴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언제까지나 살게 되었네.’

  책을 서가에 꽂아 두고 나오며,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을 떠올린 탓인지, 뜻하지 않게 책을 발견한 탓인지,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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